철학자의 죽음(15)-병사(아우렐리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황제이기도 한 아우렐리우스(121~180)에게 과연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평상시 사치와 안락을 누리지 않고 전쟁터에서도 평범한 군복을 입으며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전해지는 이 황제에게 180, 게르만족이 다시금 도나우(독일 남부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흑해로 흘러드는 강) 강변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침략이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할 수 없이 로마 제국의 영토에까지 넘어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이들을 로마 국경 안쪽에 정착시킨 다음, 인구가 줄어드는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이제 황제는 새로이 영토를 넓힘으로써 로마 제국이 다시는 게르만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물론 이 전쟁에서 아우렐리우스는 값진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 자신은 페스트(급성전염병. 피부가 검은 자줏빛으로 변한다 하여 흑사병이라고도 불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렸을 적 밤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하는 한편 신체를 단련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던 이 황제는 평생 인내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실천해왔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스토아 철학자다운 의연함과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제 모두와 헤어지는 마당에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자.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나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나를 그들과 떼어놓고 있는 것일 뿐이다.”

친구들로부터 벙어리 황소라 놀림을 받았던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이탈리아의 신학자)는 프랑스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시실리 왕의 간청으로 고국(이탈리아)으로 돌아왔다. 나폴리에 신학 연구를 위한 종합대학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년여에 걸친 파리에서의 무리한 활동으로 인하여 몸이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조용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신학대전을 완성하려는 집념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273126, 3부의 대부분을 쓰고 난 뒤 망아(忘我-황홀경) 상태에서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내가 기록해온 것은 내가 오늘 본 것에 비하면, 한낱 티끌처럼 생각된다.”고 말하며, 펜을 던지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청빈(淸貧)을 배우기 위한 도보여행 길에서 찾아왔다. 도미니코 수도원(현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위치)만의 금욕적인 훈련은 당시의 젊은이들을 강한 매력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또한 그만큼 많은 인내와 극기를 필요로 하였다. 토마스 역시 저술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종이마저 제공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작은 종이쪽지에 기록해야만 했다. 또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모든 여행은 반드시 걸어서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교황으로부터 리용 종교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도보로 여행하다가 병을 얻고야 만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었다. 그는 치료를 받던 테라치나의 한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토마스는 그의 온화하고 티 없는 성품으로 인하여 생전에 천사와 같은 학자로 칭송 받았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자 프란시스코 회(1209년 프란시스코가 창립) 학파가 주된 반대세력을 형성하여 그의 몇 가지 교리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토미즘은 도미니코 회의 공인된 철학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사후 50년에는 그 자신이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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