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21)-사형(상앙)

지금까지는 사형을 당하더라도 공식적으로, 그리고 당사자는 의연하게 맞이한 경우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정하지 못한 채, 아주 비참하거나 원통하게 죽은 경우가 있다.

나중에 상앙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공손앙(기원전?~기원전 338. 중국 전국시대의 법치주의 정치가)은 원래 위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로 건너가게 된 공손앙은 군주인 효공에게 접근하여 부국강병을 위해 낡은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에 의해 제정된 법의 내용은 엄벌주의와 연좌제(連坐制-한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특정한 범위의 몇 사람이 연대책임을 지고 처벌되는 제도), 밀고(密告)의 장려, 신상필벌(信賞必罰-상을 줄 만한 사람에게 반드시 상을 주고 벌할 만한 죄과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일) 등 법률 지상주의(至上主義)였다. 물론 처음에는 나라에 질서가 잡혀갔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 시행된 지 겨우 1년이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법률의 불편을 호소해왔다. 그런 가운데 태자가 법률을 위반하게 되었다. 이에 공손앙은 나라에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까닭은 윗사람들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며, 태자를 처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임금의 뒤를 이을 사람인지라, 관례상 벌을 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태자를 대신하여 그의 후견인인 공자건(公子虔)을 처벌하고, 또 그의 스승인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얼굴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내리니, 이로부터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며 법령에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국강병이 이룩된 진나라는 공손앙을 선봉장으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공손앙은 위나라의 공자 양에게 거짓말로 화해를 청한 다음 군사를 매복시키고 있다가 그를 사로잡아버렸다. 이 공로로 공손앙은 상()이라는 곳에 봉해졌던 바, 이로부터 그는 상앙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 이가 곧 혜왕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상앙으로부터 가혹한 처벌을 받은 무리들이 상앙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태자 시절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여 스승의 코를 베어버린 상앙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던 혜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상앙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아차린 혜왕은 아예 그를 제거해야겠다고 맘먹고, 군대를 보내 그를 체포토록 하였다.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상앙은 위나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 역시 상앙이 자기 나라의 군사를 쳐부순 데 대해 원망하고 있던 터라, 그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진나라로 추방하고 말았다. 진나라로 쫓겨난 상앙은 상 땅으로 달아나 그의 무리들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북쪽의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이 와중에 진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상앙을 사로잡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 혜왕은 상앙을 두 대의 우마차에 나누어 묶어놓고 각각 반대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이른바 차열(車裂)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로 처형하고는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돌려 보였다. 또 상앙의 일가까지 몰살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앙에 대하여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고 희롱하였다.

한편 진나라는 상앙이 쌓아올린 부국강병의 기반 위에서 더욱 강성해졌다. 상앙은 비록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가 정비한 법과 제도는 훗날 진의 시황제로 하여금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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