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 수필가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목숨을 끊었다. 근래 정치인 중에서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던진 두 번 째다. 처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소식을 접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심까지의 갈등은 치열한 내면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자신과의 양심을 건 다툼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특히 남자라면 최소한 20%의 양심은 남겨 놓아야 하고 그 20%가 마지막 자존심을 위함이라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러한 삶은 비단 정치인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이고 행동이다. 20%의 자존심이 투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옹호하고자 함은 아니다. 결정까지의 양심적 갈등과 마지막 도덕성을 말한다. 성격적으로 이러한 특성을 타고난 사람들은 내부에서 양심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특히 없는 사실을 조작해 치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을 때의 무너진 자존과 자괴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대부터 흔하게 쓰였던 심리전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은 심상정 의원과 더불어 진보의 마스코트였다. 참다운 진보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진보에 가장 가까웠던 정치인이고 언어의 화려한 비유와 비교법은 독보적이었다. 그래서 항상 대중의 인기를 안고 살았다. 재벌보다는 노동자 편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참다운 정치인이 작은 부끄러움을 안고 투신으로 보상했다. 마지막 양심을 자존심으로 죽인 것이다. 알다시피 훨씬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고도 모든 것을 부정하며 감옥에서 투쟁을 하고 있는 정치인과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에겐 마지막 자존심도 없고 그것을 다스릴 양심도 없다. 욕심이 모든 것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내부적 갈등도 없다. 그냥 억울할 뿐이다.

정치인만 자존심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대를 사는 모든 시민들에게 필수적이다. 올바른 양심에서 출발하는 자존감은 바로 정의로 직결된다. 세상이 밝아지는 것이다. 수년 전 가수 이소라는 공연을 마치고 입장료를 전액 환불해 준 적이 있다. 몸이 좋지 않아 최선의 공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최악의 컨디션에서 억지로 끝낸 콘서트가 스스로의 양심에 어긋났고 가수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음이다. 그리고 오늘 저의 공연은 도저히 여러분에게 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저에게 시간과 기회를 다시 주세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프로의 자존심이요 양심이다. 그날 콘서트라는 상품은 이소라에게 불량품이었던 셈이다. 만일 우리 정치인들이 특히 국회의원들이 일개 가수의 자존감 절반만 닮았어도 이렇게 엉망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세상을 위해 혹은 완전한 치국(治國)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던 인물도 있다. 바로 유학의 시조 공자다. 그는 참다운 세상을 위해 선정을 펴 보고자 각국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하고 정치에 참여도 하지만 뜻을 펴지 못하고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와 결국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각국을 떠돌던 당시 동행하던 제자들에게서 혼자 이탈된 공자는 성문 옆에서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제자들이 지나는 행인에게 공자의 행색을 말하고 물으니 성문 옆에 집 잃은 개 같은 사람이 있더라고 일러준다. 이른바 상가구(喪家狗)’. 당시 그의 모습이다. 자신의 세상을 향한 뜻을 위해 자존심을 감춘 것이다. 공자는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푸대접을 감수하면서까지 제후국들을 떠돌며 벼슬을 구했다. 치국이 자신의 자존심보다 중하다는 양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인들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오직 자신의 영달과 욕심을 위해 치국을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봉사’,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등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의 행동이 거짓을 대변한다. 물론 완벽한 정치인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양심은 있어야 한다. 노무현과 노회찬의 투신은 그나마 양심이다. 작은 잘못을 견디지 못한 양심이 마지막 자존심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부끄러움을 아는 마지막 정치인들이다. 자존심을 버리려면 공자처럼 세상을 위해서, 치국을 위해서 버려야 한다. 그것은 결코 버리는 것이 아닌 세상을 위한 봉사요 희생이다. 가장 깨끗했던 정치인의 죽음을 잔칫집 국수로 축하하는 부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여의도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한다. 다르다면 행동으로 보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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