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대신 총 잡고 일제 맞서 게릴라전 “그냥 죽느니 한 놈의 적이라도…”

1918년 고종 승하 소식에 음독 대마면 화평리에 충··열 삼강문 세워져

1018일은 전라도 천년을 맞이한 날이다. 호남의병장 연합체 도통령을 지낸 후은 김용구(1861~1918) 의병장은 정미(丁未)의병출신으로 영광에서 거의(擧義)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마음 아프고 한스러워 잠자고 밥 먹는 것이 달지 않아 짐승처럼 사는 것이 차라리 사람으로서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여 여러 번 자살하려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이미 죽기로써 마음을 먹었으면 한 놈의 원수와 적이라도 죽이고 죽는 것이 한결 죽어서 유익함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후은 김용구 의병장은 의소일기’(義所日記)에서 의병을 일으킨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송사(松沙) 기우만(1846~1916)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힌 유학자인 그가 택한 항일 방법은 무장투쟁이었다. 손에 책이나 붓대신 총을 잡은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후은은 이듬해 봄부터 국권을 되찾을 방법을 고심했다. 이때 성재(省齋) 기삼연(1851~1908)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자는데 뜻을 같이 하고 수개월간 서로 오가며 논의했다. 그리고 성재와 함께 대극 이순식 등 영광지역 지사들을 규합해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했다. 계원은 64명중 영광출신만 3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9명이 실제 의병으로 나섰다. 영광은 호남의병운동의 중심이었다.

1907915(음력 88)에 후은은 마침내 의병을 일으킨다. 이어 나흘 뒤 영광읍을 습격하고 지리산으로 진군해 녹천 고광순 의병진과 협력해 구례 연곡사에서 일제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후은을 비롯한 호남의병장들은 1030(음력 924)에 기삼연을 중심으로 의병연합체인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했다. 기삼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후은은 도통령(都統領), 김준(김태원)이 선봉장을, 이철위(이진사)가 중군장을, 이남규가 후군장을, 대극 이순식이 감기(監器)를 각각 맡았다. 의병진 지도부는 영광(김용구·이순식·이철위)과 장성, 나주, 함평, 고창 출신 양반과 중인으로 구성됐다.

의병진은 영광과 함평, 장성 등지를 무대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의병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 필요에 따라 협력체제로 전환했다. 주 공격대상은 영광읍내와 법성포, 나주 읍내와 영산포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와 경찰, 헌병대였다. 김용구와 이순식 의병진은 주로 영광읍과 법성포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펼쳤다. 나주 영산포와 함께 물류 중심지였던 법성포에 개항 이후 다른 곳보다 빠르게 일본경찰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 등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농민이었던 의병들은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무기마저 열악했다. 그래서 후은과 대극 의병진은 대규모 공격 대신 20~100명 단위 소규모 정예대원들로 기습하는 게릴라전을 폈다.

의병들이 사용하는 화승총 유효 사거리가 20(12m)인 반면 일본군 38식 소총은 800m에 달했다. 의병들은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한 천보총을 만들었고, 구식 납철환을 개량한 철탄’(보룡 철환)을 생산하기도 했다.

1908113, 외아들 기봉이 아버지 후은의 의병진에 합류하지만 사흘만에 흥덕 안치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기삼연이 소식을 듣고 동쪽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나가다가 외아들이 죽었도다. 그러나 아비는 충성을 위해 나가고 자식은 효도에 죽었으니 아비의 충성됨과 자식의 효성됨이 천고에 짝이 없으리로다라는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후은은 대장 기삼연이 발부상을 당하자 131일 지휘권을 인계받는다. 그러나 516(음력 417) 후은 역시 고창군 공음면 유동에 머물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두발의 총상을 입었다. 후은은 상처가 악화되고 정신마저 혼미해지자 군 통수권을 포사장(砲射將) 박도경에게 넘긴다. 박도경은 몸소 천자포를 둘러메고 대원들을 지휘해 박 포대(砲隊)’라는 별칭으로 불린 인물이다.

이후 10여 년간 장성 백암산과 용화산 등지에서 은신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기회를 엿보던 후은은 1918127, 고종의 승하(121) 소식을 전해 듣고 비분강개해 음독 자결한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는 당시 항일 구국운동의 실상을 전해주는 귀한 자료인 의소일기를 남겼다.

영광군 대마면 화평리 수촌(하화) 마을은 후은이 태어나고, 묻혀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상산김씨(商山 金氏) 삼강문(三綱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삼강문은 충신과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家門)임을 나타내는 정문(旌門)으로 후은 김용구, 아들 기봉과 며느리 청송 심씨를 기린다. 청송 심씨는 임진왜란 당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심우신의 후손이다. 남편이 전사하자 시어머니(함양 박씨)와 함께 몰래 시신을 거둬 매장했으며, 시아버지 후은이 남긴 신담록’(의소일기)을 간직해 후세에 전했다. 부자 묘소는 마을앞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정부는 김용구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국민장(1968), 아들 기봉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1)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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