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자녀(1)

철학자 가운데에는 결혼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다 간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많지는 않다. 대개의 철학자들이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또한 그들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만 이 장에서는 자녀에 대해 특이한 입장을 취했던 철학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날,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의 어머니가 그 아들을 설득하여 결혼시키려 하였다. 이때 탈레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직 결혼할 시기가 아닙니다. 그 후, 나이가 들어 그의 어머니가 결혼을 하라고 더욱더 재촉하자, 그는 또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제는 결혼할 시기가 지났습니다. 이에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려고 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에 대한 대답은 더욱 의미가 깊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선문답 같기도 한 이 말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사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걱정이 앞선다. 과연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혹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성장하다가 나쁜 길로 빠지거나, 악한 사람들에게 잘못 걸려 해코지를 당하지나 않을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며 자식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자식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부모도 부지기수이다. 오죽했으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차라리 자녀가 없다면, 근심걱정할 일도 그만큼 줄어든다. 고생고생하며 애써 돈 벌 필요도 없다. 내 한 입 해결하면 끝난다. 한 세상 편하게 살다가 세상 하직하는 날, 훌쩍 떠나면 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탈레스의 경우,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했다기보다 자식의 입장을 고려했을 수 있다. 자녀를 두지 않는 것이 나(부모)만 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터, 특히 어려운 때에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그 자식은 부모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 속에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험한 꼴 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태어나지 않은 편이 더 나을 것이기에 말이다. 물론 이 견해는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어떻든 모든 부모에게 자녀가 반드시 거추장스러운 존재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 때문에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들로 인하여 힘과 위로를 받기도 한다.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그들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자녀를 많이 둔 사람의 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壯士)의 수중(手中)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그들이 성문(城門)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제 127)

젊을 때에나 늙을 때에나 자녀는 최대의 기쁨이요 자랑거리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려 한다. 하찮은 미물도 자기 새끼에게만큼은 지극 정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사람인 바에야.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 부모는 자식 때문에 힘을 얻는다. 자식 때문에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그러다보면 어느 때엔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경우가 생긴다. 자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부모에게 기쁨, 위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일설에 의하면, 탈레스는 결혼하여 큐비스토스라는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채 삶을 마감했으되, 누이(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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