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광신대학교 복지상담융합학부, 사회복지학박사

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there is a space. In that space lies our freedom and power to choose our response. In our response lies our growth and our happiness.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함이 있다. 그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달려 있다. - 빅터 프랭클 -

20세기는 폭풍성장의 시대였다. 그 어느 시대도 20세기만큼 화려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20세기는 그 이전 수천 년의 시간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성장의 탑을 쌓아올렸다. 덕분에 생산력은 급등했고 삶의 질도 급상승했다. 하지만 인간은 만족을 몰랐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고 더 큰 것을 원했다. 문명은 성장했지만 행복은 오히려 멀어졌다. 이제 인간은 이렇게 달린 시간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힘겹고 고통스럽다.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쉽게 들린다. 경제가 어려워서인 경우도 있지만 풍요로운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현상은 일어난다. 경제는 근본이유가 아니었다. 물질이 풍요해진 만큼 정신은 더 빈곤해졌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 즉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저 문구가 그를 살린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도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라는 문구가 자기 삶에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유태인이며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가족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유태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잃고 네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다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온다.

그가 경험한 수용소 생활은 처참했다.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빵 한 조각으로 연명하며 고통스러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삶이 죽음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철저히 박탈당한 자유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빵을 힘든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는 북돋았다. 자신을 넘어 남을 위해 뭔가를 해내는 삶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빅터 프랭클은 큰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련의 연속이며 이런 시련을 이겨내려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삶에 대한 의미를 찾은 사람들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정리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 그것은 곧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은 자유를 빼앗기고 구속당하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이유와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야 하는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 사는 방식은 달랐다.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것을 당당히 나누며 시련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덕분에 그들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으며, 육체적으로도 건강했다. 결국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만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수용소의 삶은 갇혀 있고 자유가 제약당하며 그 갇혀 있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목표를 찾을 수 없고 꿈꿀 수 있는 미래도 사라졌다. 지금 우리의 삶도 수용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는 힘겹고 직장은 밥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빈익빈사회는 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느낀다. 허무감으로 의지를 빼앗긴 삶에 번개탄 연기만 자욱하다.

성공을 목표로 삶지 마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짐이 주어진다. 누구도 그 짐을 피해갈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대신 질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어떤 방식으로 지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다. 시련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기회로 산다면 우리는 보다 가치있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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