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자녀(4)

지난 호에서 아들을 사형에 처하게 한 복돈이란 사람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정한 아버지가 있었으니, 그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이다. 영조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효장세자를 얻지만, 세자는 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로부터 7년 뒤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 41세의 국왕, 영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문장과 글에 재주를 보였던 사도세자는 정치에도 탁월한 안목이 있어, 열다섯 살 때부터 부왕(父王)을 대신하여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20세 무렵부터 여러 가지 비행(非行)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궁녀와 환관(내시)을 까닭 없이 살해하고 여승(女僧)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케 한 일도 들어있었다. 그때마다 영조는 엄한 말로 책망하였다. 그럼에도 세자의 일탈된 행동은 그치지 않았고, 이때부터 그를 싫어하던 노론과 이에 동조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2) 문씨 등이 그를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나경언 같은 인물은 세자가 환관들과 역적모의를 꾀한다.’는 말까지 끼워 넣어 형조에 고발했다.

이에 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지만, 영조는 이를 거부한다. 이후 세자의 일탈행위가 더욱 확대되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한다. 세자가 이를 거절하자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뒤주(곡식을 넣어두는 수장궤짝)에 가두어버렸다. 세자가 갇혀있는 동안에도 영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랏일을 처리했으며, 이 와중에 세자는 9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때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전하께서 어려운 일을 결단하여 주시니, 그저 우러러볼 따름입니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세자의 처가는 모두 노론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에는 그동안 세자의 잘못된 행실을 알리지 않은 신하들이 처형되었다. 세자를 고발한 나경언의 경우, 처음에는 임금에게 직언한 충직한 자로 여겨졌으나 결국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간주되어 역시 처형되었다.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른 다음,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후의 정조)을 후계자로 책봉한 다음, ‘사도세자를 추앙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했다. 그러나 정조는 왕위에 오른 바로 그 날, 신하들에게 내린 교시의 첫 머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장식한다. “! 과인(寡人)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로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 의해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그렇다면, 영조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왜 뒤주 속에 가둬 죽게 했을까? 과연 사도세자의 죄가 죽음에 이를 만큼 컸을까?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를 궁지로 몰아넣을 만큼 치열한 노론의 정치적 공세와 영조 자신의 개인적인 기질, 그리고 사도세자의 심약한 마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여겨진다. 특히 사도세자의 심리상태와 관련하여, 나랏일을 맡긴 뒤부터 부왕 영조의 간섭과 질책이 더욱 심해졌고 세자는 아버지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옷 입기를 싫어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만큼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흔히 이 세상 부모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망정, 아들의 목숨을 내놓을만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간혹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들이 등장하곤 하니,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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