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칠산문학회장

좌절과 타락한 영혼의 구원자인 베아트리체를 통해 자신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당대의 세상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 단테.

중세 봉건주의를 종결하고 근대 자본주의로의 시발점이 되게 하는 르네상스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한 것은 단테의 사랑이야기인 ''신생'' 과 저 불후의 명작 ''신곡'',이었다. 그리고 그 불멸의 사랑이야기는,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순결함과 우아함으로 우리들 가슴에 살아서 빛을 발하는 천상의 여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성애(聖愛)로부터 시작되었다.

아홉 살 나이 때 첫눈에 반해버린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이 짝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베아트리체가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해버림으로써 그 짝사랑의 대상 마저도 잃어버리고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단테에게 견디기 힘든 절망과 고뇌가 없었다면 아마도 단테에게 있어서나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천상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어쩌면 르네상스의 문이 당대에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곡은 그 구도와 사상면에서 볼 때 중세 시대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그 주제에 담긴 정신과 표현의 강렬함은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편의 대 서사시로부터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인문주의는 전통적 종교 교리가 강요한 정신의 억압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력을 자극했으며, 또한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미술 분야에서부터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혁명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내게도 그런 베아트리체와 같은 J가 있었다.

J를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2년 전 고등학생 시절 어느 여름날이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만나게 된 그녀의 모습은 내게 있어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첫인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J만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반팔 상의에 검정치마, 그리고 단발머리. 수다스런 친구들과는 달리 그녀는 다소곳했고, 우리들의 대화를 들으며 어쩌다 한 번씩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눈만 깜박일 뿐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때문에 내가 J와 주고받은 대화라면 친구들의 소개로 나누게 된 각자의 통성명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렇게 맺어진 J와의 인연은 그 첫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 뒤로도 다른 친구들은 자주 보곤 했었는데 J만큼은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J의 소식이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나의 뇌리 속엔 그녀의 이름 석 자 Jys와 교복을 입은 모습만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각인이 되어갔다.

''마주 보는 눈빛이 청순하다고/혼자 생각 하면서 웃고 말았지./ 웬일인지 그 모습 잊히질 않아/가슴 설랜 날들이 얼마였었나?/그 게 사랑이었어, 그 게 행복이었어/나에겐 그 날이 다시 못올 순간이야/외롭다고 느끼는 그런 날이면/문득 생각이 나는 한 사람 있네.''

김수나 노래 ''철부지 사랑'' 가삿말 전문

그렇게 42년의 세월이 흘렀다.

청춘 시절의 그 수채화들은 아직도 기억 속에 뚜렷한데 어느덧 60대에 접어든 나이.

문득 문득 J가 생각났다.

그리고 꿈처럼, 기적처럼 J가 나타났다.

수소문 끝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고 나의 신상을 밝혀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예측대로 J는 나에 대해 기억을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실은 그녀가 나를 기억할 만 한 요인이 하나도 없었다.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다.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누구신가요?''

그녀는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고교 시절의 파노라마조차도 뇌리

속에서 삭제되어버린 상태였다.

간단히 지난 일들을 설명 한 뒤

''한 번 보고싶노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10여일이 지났다. J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를 ''만나러 오겠다''…….

''그런데 내가 찾는 그 J일까?''

만날 약속을 하고 나니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은 아닐 지 걱정이 앞섰다. 혹시라도 J가 아니면 어쩌지?

그렇게 조바심하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녀가 도착했다.

회색빛 승용차의 운전석에서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 쯤 가린 채 앉아 있는 그녀는 나의 베아트리체, J가 확실했다.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42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 한.

기적 같은 순간이었고, 꿈을 꾸는 듯 한 순간이었다.

J!

다시 또 너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는 이 새벽 시간, 마당의 화단에선 도란도란 수선화가 피어나고 있겠구나.

날이 좀 더 풀리면 우리 바닷가 크로버 피어나는 둑에 앉아서 산낙지에 소주나 한 잔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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