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법성문화진흥원 향지편찬위원장

얼마 전 지인들과 모임에서 청계천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봤더니 이구동성으로 모두가 이명박 ...”이라고 답했다. , 필자보다 연로한 게이트볼 회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박경원 장관 이야기가 나왔다. 너도 나도 칭찬일색이다.

이이는 지금부터 96년 전에 용덕리 용현마을에서 태어나 법성포초교(1937), 목포상업학교(1942)를 졸업하고, 광복 후 군에 입대하여 미 육군포병학교(1953)를 졸업했다.

이후,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여 3공 때 호남에서 유일하게 장관을 다섯 차례나 역임하고 서울 용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지냈다.

불가와 연이 깊은 법성포와 예부터 수중와우(水中臥牛)형국이라 하였던 고향의 정서가 담긴 연꽃 연()에 소 우()를 조합하여 아호를 연우(蓮牛)라 했을 정도로 고향사랑이 남달랐다.

법성포 노인들이 가장 괴롭혔던(?) 연우 박경원

장관실을 찾으면 하던 일도 멈추고 반갑게 맞아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안부를 물었제, 크고 작은 민원을 꼼꼼히 챙겨 도움을 주곤 했어...” 고인이 되신 인송(仁松) 이남백 선생의 생전 증언이다. 이렇게 고향사람들과 많이 만났지만 이이를 괴롭혔던(?) 이들은 따로 있었다.

예전에 법성포는 물이 귀했던 곳이다.

"쌀 한 바가지는 나눠 먹어도 물 한 바가지는 못 나눠 먹는다."는 곳이 법성포/. 오랜 세월 극심한 식수난을 겪으며 포 내 사람들은 살았다.

포 내 노인들이 수시로 장관실을 찾아 먹는 물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직간접으로 괴롭혔고, 포 내 사람들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홍농 지역의 논을 경작하는데 검메 나루를 건너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다리 놔 해결해 달라고 졸라댔다. 일제 때 놓은 지아닐 다리가 넘어가게 생겼다고 이 다리도 새로 놔야한다고 했다. 그 당시 지아닐 다리는 1910년 법성포-영광 간 차도를 개설하면서 가설했던 교량이었다. 모두가 예산전쟁(?)을 치러야 될 일들이었다.

결국 포구 건너 구수산 청정지역에 수원지를 마련하고 정수기가 필요 없는 1급수를 포 내 각 가정에 공급함으로서 대대손손 골머리를 앓았던 물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로서 법성포아낙들이 뒷개 저수지 등지로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다녀야 했던 문제가 단칼에 풀렸고, 쑥구지 샘에서, 은선암 자락 등지에서 퍼 나르던 먹는 물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검메 마을과 홍농 우봉 마을을 이어 주던 나루터에 교량을 가설하여 홍농 사람들과 우리고을 사람들의 불편함도 말끔히 해결되었다. 이에 법성포노인회에서는 관계 청에 교량이름을 그의 아호로 작명토록 건의하여 연우교로 관철하였다. 지아닐 다리는 광주 남양진흥이 맡아 안전한 교량이 되었다.

폐교 처분된 법성중고교와 연우 박경원

이 뿐만이 아니었다. 1960~70년대는 소 팔고, 논 팔아 어렵게 대학을 나왔어도 일자리가 없어 허구한 날 먹고 노는 먹고 대학생이 천지였다. 자연히 장관실로 온갖 취업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다. 이이는 이들을 꼼꼼히 챙겨 한사람이라도 더 취업토록 도왔고, 고향후배들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이의 가장 큰 공은 법성중고교를 살린 일이다. 광복 직후에 이 고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 모아 설립했던 영광군내 5년제 학교로 유일했던 학교가 법성중고교다. 목포출신 차범석 작사, 대구 출신 현제명이 작곡하여 교가를 제정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학교가 교장 비리에 휩쓸려 감독관청의 감사를 받아야 했고, 감사 결과 폐교 처분 통보를 받아 문을 닫아야 할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여 오늘날과 같이 학교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 바로 이이다.

1985, 법성포노인회에서는 숲쟁이에 이이의 공적비를 세웠다. 이이의 애향심과 이이의 공적을 이 비에 꼼꼼히 새겨 후세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법성포에서 숲쟁이를 경유하여 홍농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마을 길 모두를 그의 호를 따 '연우로'라는 도로 명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나 죽고나 70년이 지난 뒤.. 비를 세워라.”

법으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예부터 비를 세우는 데는 한자지 불문율이 있었다. 제 아무리 큰 공이 있어도 산사람의 비석을 세우는 일(生者立碑)은 용납되지 않았고, 본인도 사양하는 것이 지당한 법도였다. 굳이 권유하면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죽고 난 뒤에 세우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해동공자로 공경하며 우러러 봤던 우암(尤庵) 송시열도 임종유언에서 나 죽은 뒤, 70년이 지난 뒤 묘 앞에 비(墓前碑)를 세우도록 하라.”고 할 정도로 우리네 선현들은 산사람 비를 세우는 일에 사양하고 신중했으며 금기시했다.

그럼에도 법성포노인회에서는 이와 같은 금기를 깨고 생자입비하였고, 이를 사양한 박장관은 우격다짐으로 강요하는 노인들 등살(?)에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법성포노인회에서 세운 이이 공적비는 돈 몇 푼으로 자기이름 내자고 세운 요즘 같은 공적비가 아니다. 법성포초교 교정에 있는 송은(松隱) 신석범 선생의 공적비와 함께 우리 고을 사람 모두가 공감하고 고인을 그리고 생각하며 세운 비다.

조아머리에 도래지를 만든 군수가 누구였지라우?”

김봉열 군수였어. 교회에서 엄청 반대했었제...”

청계천 하면 누가 생각나요?”

그야 이명박이제

그럼 법성하면 누가 생각나요?”

그야 박경원 장관이제. 그 양반 덕 안본 사람 있어...?”

앞으로 옹성하면 누가 떠오를 것 같쏘?

글세... 이낙연 총리 아닐까? 국회의원도 네 번이나 했고, 영광군 최초로 도지사도 지냈응게...”

필자가 서울 용산 한남동 살 때, 이이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고향분이고, 장인어르신 닦달(?)에 열심히 도왔다. 이이가 일제 때 목포상업 4년 후배다.

이이의 공적은 모두 5.16이 뿌리다. 필자의 사관과 달리 고을 인심은 이이 편이다.

법성고을 사람들의 염원대로 법성진성이 문화재청의 심의를 하루빨리 마치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두서없이 엮어보았다.

---------------------------------------------------

박경원 장관은...,

1923년 전라남도 영광 출생으로, 본관은 밀양, 호는 연우(蓮牛)이다. 1942년 목포상업고등학교,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53년 미국 포병학교와 1960년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국방대학원을 수료했다.

1950년 제11사단 참모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당시 박정희 대령 등과 함께 포병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3사단 포병 사령관을 역임했다. 1956년 보병 제1사단장, 1958년 보병 제27사단장으로 임명됐으며, 이후 육군본부 병창감, 육군첩보부대장을 거쳐 제132군단장으로 발탁됐다.

2군단장 재직 시절, 대침투작전에서 적 사살 2명 및 생포 2, 월북기도자 6명을 검거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경상북도지사로 임명되었으며, 19621016일 한신 장관의 후임으로 제27대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정부 수립 후 최초의 현역 군인 내무부 장관이 됐다.

196311월 내무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다시 군에 복귀하여 육군 중장으로 합동참모본부 본부장을 지냈으며, 1965년 다시 2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1966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군 예편 후, 196612월부터 196710월까지 김병삼 장관의 후임으로 제19대 체신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 시기 신라5능보존회 총재로도 활동했다. 체신부 장관 사임 후에는 곧바로 안경모 장관의 후임으로 제17대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685월에는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내무부 장관 재임 중, 과잉 생산단계에 있던 시멘트를 전국적으로 보급해 새마을운동을 확산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아울러 주민등록 제도 실시, 예비군 및 민방위대 창설, 크리스마스 조용히 보내기 운동 등을 추진했다.

내무부 장관 퇴임 후, 5·16재단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726월 대한석탄공사 총재를 지냈다.

197212월에는 유신헌법에 따라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748월부터 197512월까지는 홍성철 장관의 후임으로 제36대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세 번째 내무부 장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19793, 10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마포·용산지역구에서 당선됐으며, 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정계 은퇴 후, 대한배구협회장, JSA 자유의 집 건설단장,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고문, 국제 친선교류단체인 Friend Force International의 한국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2008220,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