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어머니에 대한 회한(悔恨)으로 첫 강의를 시작했던 노교수님은 굵은 주름위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끝내 강의를 다 마치지 못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노교수님의 어머니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아현동의 한 재래시장에서 풀빵장사를 하셨다고 했다.

다니던 학교와 살던 집이 시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등하굣길에는 시장골목을 통하는 길이 빠른 길이었지만 그는 늘 두세 배나 먼 길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좁은 시장 통로 입구 한 구석에 바람 빠진 손수레를 펼쳐놓고 풀빵을 굽는 꾀죄죄한 어머니의 모습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수업에 시장견학이 들어있었는데 선생님은 물론 반 급우들이 학교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을 돌아보는 체험학습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시장견학은 이 후 노교수님에게 평생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의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는 시장을 둘러보는 선생님과 급우들 앞에서 풀빵장수 어머니와 마주쳐야 하는 순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 여겼기에 밤새 잠까지 설쳤으며 차라리 어머니가 사고라도 나서 못나오셨으면 하는 불효막급한 생각까지도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시장에 들어서며 일부러 뒤쳐져 걸어갔기에 저만큼 앞서 가시는 선생님의 눈은 어찌어찌 피할 수 있었으나 꽁무니에 쳐진 몇몇 급우들의 눈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렇게 염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들을 만난 반가움에 연거푸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어머니를 애써 못 들은 척 외면하는데 급우 하나가 너를 부르는 것 같다며 소매를 잡아끄는 바람에 어머니 앞에 서야만 했다.

그러나 노교수님은 여태까지 조바심 댔던 것과는 달리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어머니 앞에 당당하게 서서는 아주머니는 누구세요?”라며 정색을 하고 있었다.

순간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주려고 싸시던 풀방봉지를 힘없이 내려놓고는 촛점 잃은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시더라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들을 몰아세워 시장 밖으로 서둘러 나와서도 한참 동안 그는 아주머니(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기분 나쁘다며 씩씩거렸다.

자신의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풀빵장사나 하는 저런 못난(?) 어머니가 아니라고 여러 번 강조를 하는 것도 부족하여, 모르는 아주머니가 자신을 아는 체 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말을 수업이 했다.

노교수님이 사회에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는 운명을 달리하셨는데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리면서 그 날 자신을 쳐다보시던 어머니의 슬픈 눈빛이 떠올라 밤새 울었다고 했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그 가녀린 손으로 풀빵을 구워 자식 셋을 가르치셨던 어머니,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급우가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자랑스럽게 어머니를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로 용서를 빌고 또 빌었지만 어머니는 그날 그 고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끝내 불러주지 않으셨다.

노교수님은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가끔 아현동 고가도로 근처에 있는 시장을 찾았다고 했다.

고운 모습의 아주머니 한 분이 말쑥하게 차린 손수레에서 풀빵을 굽고 계셨기에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붕어빵 한 봉지를 사 같이 간 어린 자녀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자신도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순간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목 놓아 울고 말았다.

한 참 동안을 서럽게 울다가 진정을 한 그는 주위에 늘어선 시장 상인들을 향해 지난날의 불효에 대해 고백을 했다.

오래 전, 이곳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풀빵 장사를 하시던 아주머니가 자신의 어머니였으며 그 날 자신이 어머니를 외면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었노라고.......!

젊은 제자들을 대면하는 첫 강의시간,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신 그 연세에도 어머니가 그리우셨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부모님의 희생을 잊어서는 않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음일까?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얘기 하시던 노교수님의 눈가에는 눈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다.

어버이날, 늘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던 어머니의 묘소를 찾았다.

부모님 영전(靈前)에서 제일 서럽게 우는 자식이 가장 큰 불효자라고 했던가.

이제는 카네이션마저 가슴에 달아 드릴 수가 없기에 산소 앞에 꽃바구니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돌아오는 길에 왜 그리 눈물이 앞을 가리는지 나는 역시 불효자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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