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의/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조선의 유교

<1121호에 이어> 조선조 유학은 程朱道學을 수용하여 치밀한 개념 분석과 엄격한 실천 행위를 강조했는데, 특히 중기에 배출된 知的 巨人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활동과 내용에서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닌 집단을 양산하였다.

당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포함하여 사대부들은 유교를 중심으로 숭유엊 성리학을 중시했다. 통치철학으로 덕치주의를 내세워 유교로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으며 또, 앙조를 새로 세우는 것이기 깨문에 무엇보다 민심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백성들에게 고려왕조의 불교의 폐단을 당연스럽게 강조했던 것.실제로 고려말, 승려들이 왕권을 잡으려 하는 등 악행이 널부러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가 좋지 않다고 배척하고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牛溪 학맥의 계승

강항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594(28) 校書館 正字로 있을 때에 경기도 파주로 牛溪 成渾을 찾아가 기호유학의 한 맥인 우계학맥을 계승한다.

安珦(晦軒) 權溥(菊齋) 李穀(稼亭) 李穡(牧隱) 鄭夢周(圃隱) 吉 再(冶隱) 金叔滋(江湖) 金宗直(佔畢齋) 金宏弼(寒暄堂) 趙光祖(靜庵)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成渾(牛溪) 姜沆(睡隱)

<안동교박사의 세미나 일부 자료참조><이은 강대의 수은 강항선생 일대기 일부자료 참조>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유교

1) 이 무렵 일본 사상계의 변화 순수좌(수은 강항을 만나 후지하라 세이카로 개명) 정가경(定家卿) 12()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한학(漢學)을 익혔고 7~8세경 번주용야(藩州龍野)의 경운사(景雲寺)에 들어가 일산파(一山派)의 동명종호(東明宗昊)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문봉선사(文鳳禪師) 13회 기일(忌日)에 시()를 지어 일등을 했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그리고 16세에 이미 시집을 펴냈을 정도로 총명했다.

후지하라세이카가 17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번주를 공격했는데 번주용야의 성주(城主) 아까마스 히로쓰(赤松廣通)가 경운사(景雲寺) 부근 좌강촌(佐江村)에 숨어 살다가 후지하라 세이카와 사귀게 되었다.

그때 아까마스 히로스의 나이는 16, 후지하라 세이카보다 1살 아래였다. 그 후 두 사람의 교우(交友)는 깊게 이어져 많은 경전을 펴내고 유학(儒學)을 몸소 익히는데 동참하게 된다.

한편, 후지하라 세이카가 30세가 되었을 때 대덕사(大德寺)에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통신사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와서 대덕사에 묵게 되었다.

이때 후지하라 세이카는 이들 통신사와 만나게 되고 서로 대화를 통해 학문적 교류를 갖게 되었다. 특히 서장관 허성(許筬)과는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경서(經書)에 대해서도 논하게 되었다.

지금도 후지하라 세이카의 문집에는 당시 허성이 지어준 국화(菊花)라는 詩題(시제)의 시와 함께 여러 수의 시가 실려 있다고 일본 학계에서는 전한다.

이 때 허성에 의해 후지하라 세이카는 유석불이(儒釋不二; 유교의 진리와 석가의 진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사상에 접하게 된다.

또한 장자(莊子)의 무위자연설 무심(無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의 교유(交遊가 두터워 졌으며 허성은 장문의 글을 지어 후지하라에게 주기도 하였다는 것.

이처럼 조선의 포로 선비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과 체험을 갖고 있던 후지하라가 몇 년 후에 강항을 만났고 강항을 만난 이후 후지하라는 승복을 벗고 본격적인 유학(儒學)을 넘어 유교의 참된 수업에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밝힌대로 거듭 5강조하자면 강항(姜沆)에 의해 그토록 많은 경서(經書)를 접하게 되면서 후지하라세이카는 승려복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유교인의 유학자 복인 도복(道服)으로 갈아입고 유교의 의식(儀式)을 몸소 익혔다.

경자년(1600) 519, 부산앞바다로 강항이 귀국하게 되고, 그해 915일 관원(關原)의 대회전(大會戰) 때 아까마스 히로쓰(赤松廣通)가 모함에 말려 39세 젊은 나이로 자결하게 되자 후지하라 세이카는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면서 불굘떤 와벽하게 유교에 귀의할 것을 표명하였다.

즉 도구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측근 학승(學僧)인 승태(承兌), 영삼(靈三)과의 토론 이후 미래본위의 불교세계관 보다 현실사회의 질서와 인륜도덕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아까마쓰에게 자결토록 명령한 도구가와에 대한 원한 도 엿 볼 수 있다. 결국 후지하라세이카가 44세 되던 해 후지하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임신승(林信勝 ; 羅山(하야시라잔))이 후지하라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당시 라잔의 나이 22세였다.

라잔은 이미 학문의 경지가 높고 여러 방면의 책을 읽고 있었다. 후지하라는 라잔에게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가르쳤다.

연평답문(延平答問)이라는 책은 주자(朱子)의 스승 이연평(李延平)에게 주자가 묻고 스승이 답한 내용을 기록한 책인데 여기에는 우주만물의 도리를 궁구하고 그것을 체험하며 함양해 가는 도리를 설명해 놓은 책이다.

라잔이 이 천명도설을 출판하면서 발문을 붙였는데 옛적에 원()의 조맹부가 신라의 김생(金生)의 글씨를 보고 찬탄하여 어디엔들 천재가 태어나지 않으리오 라고 하였는데 이제 나도 이 천명도설에 대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라고 썼다.

 

2) 일본 유학의 중흥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 그가 읽은 440여권의 책 목록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송, , (, , )대의 유학자가 쓴 주요저서 대부분을 조선각본으로 읽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건너간 것을 비롯하여 도구가와 시대에 들어 와서 통신사의 내왕으로 문물의 교류가 활발한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야시 라잔은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시대 즉 일본에서 말하는 에도(江戶)시대의 위대한 학자로서 사상의 혁신, 문화의 혁신을 이루는데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21세 때에는 논어집주(論語集注)를 공개적으로 강의할 만큼 학문적 업적을 쌓았고 후지하라 세이카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연평답문(延平答問)을 비롯하여 본격적으로 유학(儒學)수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하야시 라잔에 이어 나타난 또 하나의 왜국의 유교의 별이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 1618~1682)이다. 안사이는 라잔 보다 35세 연하였다.

그리고 막부(幕府)를 등지고 일어난 하야시 라잔과는 그 학풍을 달리하면서 대성하였다. 안사이는 경도(京都)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세때 묘심사(妙心寺)에 들어가 선학(禪學)을 공부하다가 주자학에 관심을 두고 25세 때에 승복을 벗고 환속한다.

수은 강항은 이기일원론의 우계학파로 이어짐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며 그 사상이 후지와라세이카로 계승되고 하야시 라잔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는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린으로 인해 노략질한 유교의 경전을 급격히 섭렵하고 부터는 주자의 경의설(敬義說)에 심취하고 이기이원론의 퇴계 이황의 자성록에서 나름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스승인 하야시 라잔과는 달리 주자 연구에 깊이 빠지면서 사색적 실천적 수양에 중점을 두고 사회에 대하여 활동적 태도를 갖는 학풍을 세웠다.

특히 그들의 국사를 연구하고 신유(新儒) 합일설을 주장하면서 학문의 쇄신, 사회개혁의 추진 등으로 주체적 학풍을 이끌어 그의 문하에는 많은 학자와 사회지도자, 그리고 혁명가들이 배출되게 되었으며 여기서 근대 일본이 디자인되며 유교의 오류가 나타나고 역사왜곡으로 심각하게 번지게 된다.

왜국의 문화유산이 포로 강항에 의해 유교가 전파되어 근대 일본으로 현재의 선진국 진입으로 발전되어졌음에도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는 진실된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포로인 강항선생에 의해 유교가 전파되었다는게 너무도 수치스럽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사상이 다른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궤변의 논조를 펼쳐 현재의 일본의 학문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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