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수필가 곽일순

이번에 세월호를 연상하게 하는 대형 선박사고가 또 터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속한 조치다. 멀리 헝가리에서 일어난 사고지만 정부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설화에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당에서 다시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골든타임 3이라는 말로 공분을 사고 있다. 이쯤 되면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당을 위해서는 국가가 위기에 처할수록 좋고 나를 위해선 당이 위기에 처해도 상관이 없다. 이른바 잊히지 않는 정치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설화든 막말이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론의 조명이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은 부동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태극기 부대라는 지지층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내년 총선에서의 후보 지명이다. 겉으로는 점잖게 나무라면서도 속으론 즐기는 사람이 바로 당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의중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얇고 경박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욕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가리고 있다. 스스로를 모르니 자신을 사랑할 방법을 잊었고 길을 모르는 삶은 대의가 아닌 대욕만 만들어내고 있는 꼴이다.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권력을 지향하는 부류는 사회에 흉한 무기로 남는다. 그래서 선조들은 모든 공부의 바탕에 를 깔았다. 그리고 나를 알기 위한 기초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공부해 사물의 탐구로 앎을 확충해 나가려 했다. 이어서 의지를 성실히 하고(誠意) 마음을 올바로 추슬러 몸을 닦았다(正心修身). 먼저 를 돌아보고 파악해서 사람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뒤에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나라를 다스렸다(治國). 사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던 과목이 대학과 중용이다. 예기의 한편이지만 주자가 독립시켜 주석을 달아 중용장구(中庸章句)와 대학장구(大學章句)로 재정비를 하면서 조선 성리학의 축을 이루는 중요한 과목이 되었다. 바로 유학의 윤리과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은 500년을 버텼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델포이의 신탁에서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다. 주관적 입장에선 를 알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다. 즉 깨달음이다. 이른바 영지주의의 신비한 깨달음과 지식인 그노시스에 해당한다. 그래서 도마복음의 예수 역시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작품에서 아트만(眞我)’을 언급하며 초월적 자아를 말했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부처를 보고 신을 보고 예수를 보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는 공부가 대학이요 중용이다. 욕심으로 흐려진 자신을 바탕으로 삼아 세상에 나가면 사회적 적폐라는 무기가 되어 해악을 끼칠 수밖에 없다. 나를 모르고는 절대 대의를 행할 방법이 없다.

 현재 우리의 정가는 어떠한가. 꼴이 말이 아니다. 행동은 그들이 하고 부끄러움은 온통 국민들 몫이다. 중용에선 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너무 지나침과 모자람에 두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이유 역시 지나침과 못남에 두었다. 중용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용은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 자아(眞我)’에 해당한다. 지나친 사람은 지자(知者)와 현자(賢者)요 못 미치는 부류는 우자(愚者)와 불초자(不肖子). 어려운 것 같지만 뜻은 명료하다. 도덕을 벗어난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치국을 생각하기 전에 적어도 금수의 표피는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라고 모두 말은 아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아픈 상처를 골라 건드리는 언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국민의 아픔을 전혀 역지사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의 일을 본다면 결과는 뻔하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전에 그러한 상황을 아프게 겪었고 아직도 후유증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를 모르면서 대의라는 칼을 뽑으면 흉악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배웠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를 안다는 것은 큰 과제다. 특히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중용에서 이르는 지자와 현자의 넘침이 너무 과하다. 여기에 이들을 동조하는 태극기를 앞세운 우자와 불초자 무리의 부족함과 못남은 극에 달해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미국 국기를 들고 대항하고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하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편협한 지식으로 왜곡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은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나를 알지 못하면 세상을 보는 눈은 절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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