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를 많이 겪었으면서도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지니고 계셨다”

다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독파국립광주박물관 관장, 다산학연구원 원장 등 활동

현암(玄庵) 이을호(李乙浩·1910~1998) 선생은 풍파를 많이 겪었으면서도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지니고 계셨다.

현암 이을호 선생은 1920년대 후반 서울 중앙고보를 다닐 때 폐결핵에 걸렸다. 당시 종로 화평당 약국이 유명했다고 한다. 화평당에는 함경도에서 내려온 최승달 선생이 있었는데, 최승달은 동무(東武) 이제마의 8대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8대 제자 중에 7명은 이북에 있었고, 최승달만 서울에 내려와 화평당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폐결핵을 완치하고 나서 현암은 이제마에게 심취하여 경성약전에 들어갔고,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최초로 한글 번역했다.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용어도 이을호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37년에는 영광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주모자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된다. 16개월간 감방 생활을 하면서 한문으로 된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파한다. 다산학을 개척하게 된 계기였다.

그의 한문 실력은 외가의 영향이다. 외가인 영광의 창녕조씨 집안은 자체적으로 적서암(積書庵)이라는 도서관을 운영했을 정도로 호학하던 집안으로 유명하다. 조씨들은 북경에까지 책을 구입하러 사람을 보내기도 하던 집안이었다. 인근의 식자층이 적서암에 와서 보고 싶은 책을 읽으며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 어린 이을호는 일찍부터 외가 어른들로부터 한학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간양록(看羊錄)'을 번역하다가 6·25가 발생하자 목포에서 흑산도로 들어갈 때 청진기, , 체온계 그리고 '간양록'만 달랑 가방에 넣고 흑산도행 배에 올랐다. 영광 출신인 이낙연 총리도 전주이씨 양도공파인데, 이을호와 항렬이 같은 집안으로 알고 있다.

현암은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영광중학과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세 때 서울에서 최승달(崔承達)로부터 이제마(李濟馬)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배워 한의학(漢醫學)에 입문했으며, 20대 초반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를 졸업했다. 이후 이을호 선생의 활동은 40대 중반까지의 한의학 연구시기와 40대 중반 이후의 다산 실학 연구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현암은 23세 때부터 해방을 맞던 35세 때까지 고향 영광에 약국 호연당(浩然堂)을 열었고, 조헌영(趙憲泳)이 주간하는 동양의약(東洋醫藥)’의 간행에 참여했다. 또한 민족운동을 위한 청년단체인 영광갑술구락부 및 체육단(體育團)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수감됐으며, 옥중에서 유교 경전을 읽고 동양철학에 입문했다. 해방 후 영광남녀중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지냈고, 38세 때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약국장이 됐으며, 42세 때부터 광주의과대학의 강사로 약제학을 강의했다.

특히 현암은 45세 때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동양철학과 다산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전남대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학내에서는 박물관장·문리과대학장을 역임하고, 학외로는 광주시교육회장·한국철학연구회장에 선출됐다. 57세 때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68세 때부터 79세까지 국립광주박물관 관장을 지냈고, 다산학연구원 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현암은 다산 경학 연구의 개척자로서 한국사상사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다산의 실학사상을 수사학(洙泗學)으로 인식하는 입장을 제시했다. 나아가 실학을 개신유학(改新儒學)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실학의 개념 논변을 검토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한의학과 관련하여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사상의학을 유학사상사 속에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했다.

저서로는 다산경학사상연구(茶山經學思想硏究)’(1966)· ‘다산학의 이해’(1975)· ‘정다산의 생애와 사상’(1979)· ‘다산학입문’(1983)· ‘다산의 역학(易學)’(1991) 등이 있으며, 다산의 경학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다산사상을 체계화함으로써 다산학을 정립하는데 평생의 심혈을 기울였다. 그 밖의 저서로는 조선후기 실학사상사 전반에 관한 해석을 시도한 한국개신유학사시론(韓國改新儒學史試論)’(1980)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사상의학원론(四象醫學原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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