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4대 성인의 제자들(석가모니)

석가모니는 (초기 불교교단 성립) 이후 45년 동안 라자그리하와 슈라바스티(사위성-지금의 네팔 남서쪽에 이웃해 있던 코살라국의 서울)를 중심으로 설법을 해나갔다. 석가의 가르침은 깊고 높고 거대하였다. 그리고 듣는 상대방에 따라서 문답형식이나 비유, 또는 설화를 활용하는 재치를 발휘하였다. 또한 알아듣기 쉬운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제자의 수가 불어났다. 경제적으로 돕는 귀의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자그리하의 비파사라 왕이 가란타의 동산에 건물을 지어 바치니, 이것이 승가람마(승가는 중, 람마는 동산의 뜻. 여러 승려들이 살면서, 한데 모여 불교의 도를 닦는 곳)의 시초가 되었다. 이를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부른다.

석가는 이때부터 50년 동안 변함없이 설교로 평생을 보낸다. 우선 마갈타 나라의 왕사성에서 전도 활동을 한 뒤,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가섭 3형제와 그 제자 1천여 명을 불교에 귀의토록 하였다. 나라타 촌에서는 사리불과 목건연을 설복시켜 그 제자 1250 명을 제자로 삼았다. 고국에 도착하여서는 아버지인 정반왕과 가족, 아들을 제자로 삼고, 그 후 서북방 구사라 나라의 사위성에 가서 급고독과 기타를 제자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은 공통으로 기수급고독원(사위성의 남쪽에 위치. 급고독과 태자인 기타가 함께 바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음)을 석가에게 기증하였다. 교화활동 5년째에는 베사리 성에 가서 이모이자 계모이기도 한 마하파사파제와 과거 자신의 아내였던 야수다라를 제자로 만드니, 여성수행자 비구니도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니라고 부르는 남녀불교도 네 종류의 완비를 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첫째 비구란 출가승 가운데 남자스님을 가리키고, 비구니란 출가승 가운데 여자 스님을 가리킨다. 또 우바새란 재가승(在家僧) 가운데 남자 신도를 말하며, 우바니란 여자 신도를 가리킨다.

석가에게는 열 제자로 불리는 사리불, 목건련, 대가섭, 아리루다, 수부티, 부루나, 가시연, 우파리, 라후라, 아란 등이 있었다. 첫 번째 제자 사리불은 석가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되었다. 인도 중부의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왕사성 근처에서 태어난 브라만 출신으로,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당시 유명한 논사(論師)라 일컬어지던 산자야 밑에서 배우는 중에 250명의 제자 중에서 제1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불제자 아설시(阿說示-석가가 왕자 때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하고 또 처녀들로부터 우유죽을 얻어 마시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최초의 제자가 됨)의 가르침을 듣고, 친구인 목건련과 함께 250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석가에게 귀의했다. 석가모니의 후계자로까지 지목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스승보다 먼저 입적(죽음)했다.

두 번째 목건련은 제자 가운데서 신통 제일이라 불리는데, 용모가 단정한 데다 학문에 정통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친구인 사리불의 말을 듣고 제자들과 함께 죽림사원에 도착하여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전할 때 이를 방해하는 도깨비나 용()을 신통력으로 제압하거나 이단자들까지 내쫓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날아다니는 물체를 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과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포교의 길에 나섰다가 난폭한 이교도(바라문 교도들)가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입적(순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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