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성인의 제자들(석가모니⑤)

석가모니의 일곱 번째 제자인 가전연(迦旃延)은 서인도 아반티 나라(갠지스 강 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안들이 형성한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 사람으로서, 크샤트리아(카스트 제도 가운데 두 번째 계급인 왕과 무사계급) 출생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왕의 명령으로 석가모니를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스승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넓고 깊게 이해하고, 이 도리를 잘 설명하여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도를 깨우친 후 귀국하여서는 왕을 교화하고, 왕을 위해 여러 가지 꿈을 해설해주기도 하였다.

가전연은 여러 가지 법과 제도를 설명하는 일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토론을 이끌어가는 데에도 월등했다고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불린다. 몇몇 왕들에게 인도의 계급체제인 사성(四姓-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다라의 네 계급)의 폐단을 지적하고 모두가 평등해야 함을 주장했다고도 전해진다.

석가모니의 여덟 번째 제자는 우바리(優波離)이다. 그는 미천한 신분인 수다라출신으로서, 카필라 성에서 왕족인 석가족의 머리와 수염을 깎는 노예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큰 깨달음을 얻은 후 6년 만에 고향 카필라 성으로 돌아온 석가모니는 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출가사문(스님)을 공양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 몸소 거리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기 시작하였다. 탁발(음식을 얻어먹음)하는 아들을 보고 놀란 정반왕은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렸다. 이때 석가모니는 자신을 대신하여 장차 왕위에 오를 이복동생 난다와 친아들 라훌라를 출가시킨다. 난다는 막 결혼식을 올린 직후였고, 라훌라는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이듬해 석가족의 여섯 왕자들(정반왕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고, 그들에겐 모두 여섯 명의 왕자들이 있었음)이 출가를 위해 교단을 찾아왔다. 이때 석가족의 이발사였던 우바리도 왕자들의 머리와 수염을 깎아주기 위해 함께 왔다. 왕자들은 입었던 옷가지와 지니고 있던 돈과 보석을 모두 우바리에게 맡겼다. 이발사로서는 평생 한 번 만져보기조차 힘든 것들이었지만, 우바리는 기뻐하지 않았다. 신분이 미천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 자신도 출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석가모니를 만난 우바리는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출가를 요청한다. 석가모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우바리의 머리카락은 즉시 깎였고 몸에는 가사(袈裟-승려가 장삼 위에 걸쳐 입는 옷)가 입혀졌다.

한편, 여섯 왕자는 자유를 단 1주일만 더 누려보기 위해 출가를 미루고 있었다. 진탕 향락을 누린 뒤에야 그들은 석가모니를 찾아와 제자가 되길 간청했다. 그리고 선배수행승들에게 한 명 한 명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천민인 우바리가 거룩한 수행자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1주일 전만 해도 머리를 깎아주던 이발사이자 하인에게 예를 갖춘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때 석가모니는 준엄하게 나무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부처님의 법 앞에서는 교만함을 버려야 한다.” 간발의 차이로 왕자들보다 먼저 출가하게 된 우바리는 교단의 규칙에 따라, 그들의 사형(師兄-먼저 입도한 승려)이 되었다. 그날 불법(佛法)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우바리는 석가족 왕자들보다 더 앞자리에 앉았다. 스승의 만민평등 정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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