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하는 정치가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는 지름길이라 생각해요"

'정치도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선수·코치·체육회 사무국장 등 평생을 체육인으로 활동

191, 110.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구와 구릿빛 피부는 어디서나 당당한 그의 활동을 보여준다. 오광덕(민주당·광명3) 경기도의원은 자신을 '평생체육인'이라 말한다.

고교 야구선수에서 매일 축구를 하는 생활체육인으로 변모한 오 의원은 스포츠인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직설적인 모습과 숨길 줄 모르는 성향으로 고스란히 보여줬다.

"정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도를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잔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가는 사람은 결국 손가락질을 피하지 못해요. 정치인 100명 중 99명을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약속하지만, 결국 1명이 인정받게 된다고 믿어요"

오 의원은 1964년 영광군 법성포에서 36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때부터 농부였던 집안에서 '정직'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라났다.

그의 건장한 체구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학창시절 반에서 키가 가장 큰 아이를 놓치지 않았고, 건장한 체구에 끌린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초등학교 5학년부터 유도를 시작했다.

그렇게 '체육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는 사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야구 열기가 뜨거웠던 당시, 야구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삼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법성중학교 2학년 시절, 야구선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야구 명문인 광주상고로 진학해 투수로서 고교야구선수로 활동했다.

"당시는 고교 야구의 인기가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였어요. 마침 중학교 체육선생님이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야구선수로 시작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또래보다 늦게 시작한 그의 야구 실력은 명문 광주상고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래서 야구단을 창단하는 목포 영흥고로 전학해 고교생활을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산정초등학교와 영흥중학교 등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코치로서 KIA타이거즈와 LG트윈스 등에서 활약한 최향남 선수의 어린 시절을 지도하기도 했다.

4~5년 간의 야구코치 생활 후에는 생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각종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생활체육과 지역 활동은 계속했다.

광명시 호남향우회연합회 사무총장, 5도민 협회 사무총장, 광명시 생활체육회 사무국장 등을 맡아왔다.

특히 광명시 생활체육회 사무총장을 10여년 간 맡으며 지역 대표들과 전국과 경기도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각종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해왔다.

김포시에서 열린 생활체육대축전에서는 지역체육인들의 단합을 보여줄 수 있는 '입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회 개회식에 선수들이 입장하는 입장식과 이를 평가하는 '입장상'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상이었어요. 스포츠가 그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홍보 효과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당시 광명시에서 KTX가 한창 출발을 시작했던 시점이라, 선수들과 함께 30m 길이의 KTX 모형을 만들어 입장식에 들고 들어갔죠. 그걸로 입장상을 받은 게 기억에 많아 남아요"

그가 광명시 생활체육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기간은 광명시의 생활체육이 한창 활성화되던 시절이었다. 10여년 사이 광명시는 인구 33만 중 2만여명이 생활체육을 즐기는 도시가 됐다. 오랜 사무국장 활동은 자연스레 지역 생활체육시설 확충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광명시에는 여전히 종합운동장도 없었고, 생활체육 지도자도 턱없이 부족했다.

선거기간만 되면 정치인들은 각종 생활체육 관련 공약을 내놨지만, 당선 후에는 예산을 이유로 외면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다.

"체육은 문화와 함께 도민들과 주민들에게 가장 밀접한 분야에요. 체육시설을 확충하는 건 그런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고, 특히 생활 체육인들이 모이는 자리는 그 자체로 지역 공동체가 될 수 있어요. 10여년을 재직하면서 지역의 생활체육은 활성화됐지만, 아직 종합운동장 하나도 없는 상황이네요."

그는 제10대 경기도의회 입성 후에는 자연스럽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열악한 생활체육 지도자들의 처우개선 문제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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