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성인의 제자들(소크라테스③)

소크라테스의 열성적 제자인 아이스키네스는 청년 무렵 스승의 재판과 임종(臨終) 장소에도 참석하였다.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하는대화편(對話篇)을 만들어, 스승의 참모습을 가장 잘 전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뒤, 한때 시라쿠사(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있는 도시)의 폭군적 지배자인 디오니시우스 왕을 섬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크세노폰은 아테네의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파르타와의 전쟁 때에는 기병대의 정예부대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극단적인 민주주의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크세노폰 역시 권력을 잡은 보수정권에 동조했기 때문에,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다시 들어섰을 때에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몇 년 후 크세노폰 역시 반역자로 지목되어 추방되었다.

크세노폰의 생애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경험은 고레스 왕이 이끄는 그리스 용병대에 들어간 일이었다. 그렇다면, 고레스 왕이 누구인가? 메디아왕국의 왕 아스티아게스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딸의 오줌이 황금 강물로 변해 왕국을 홍수로 만들어버렸다. 이튿날 이 꿈의 해몽을 사제들에게 묻자 그들은 당신의 손자가 왕국의 통치를 위협할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딸을 변두리의 작은 왕국이었던 얀산의 왕에게 시집보내버렸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고레스이다.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인 고레스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수석고문관이 아기를 양치기에게 건네주면서 도망치도록 하였다. 양치기는 산속에서 아기에게 이리의 젖을 먹여가며 정성껏 키웠다. 고레스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외할아버지(아스티아게스)의 눈에 띄었다. 그러나 아스티아게스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외손주를 죽이지는 않았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고레스는 안샨의 왕이 되어 메디아왕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그의 군대가 왕을 배신하고 고레스에게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외할아버지의 나라는 외손주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만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의 모든 지역이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레스가 바빌로니아 공격대를 모집하고 있을 때, 크세노폰은 스승(소크라테스)의 충고를 뿌리치고 이 군대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고레스가 전사함으로써 1만 명에 이르던 그리스 용병부대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지휘관으로 선출된 크세노폰은 이 부대를 이끌고 온갖 고난을 겪은 뒤에 2년 만에 귀환하였다. 1,500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이 위대한 업적은 젊은 크세노폰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외국을 떠돌며 우여곡절을 겪던 그가 기원전 365년 무렵 아테네로 다시 돌아왔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지만,변명,향연,기억할 만한 일들등의 저서를 남긴다. 그의 저서들은 플라톤이 남긴대화보다 실제 소크라테스 모습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플라톤과 달리, 그가 주목한 부분은 소크라테스의 개인적 일화(에피소드)와 만찬회에서의 대화 및 교육의 실제적인 측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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