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성인의 제자들(소크라테스④)

소크라테스의 제자라면, 수제자에 해당하는 플라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넓은 이마의 소유자인 그는 체격이 훌륭한 데다 그림공부를 하기도 했으며, 또 서정시와 비극을 썼다고도 한다. 원래 그는 철학자보다는 정치가의 길을 갈 뻔하였다. 그런 그가 철학을 일생의 과업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를 알게 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스무 살 때, 디오니소스 극장의 비극 경연대회에 나갔다가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강연에 커다란 감명을 받은 그는 저는 이제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며, 즉시 가지고 있던 비극 대본을 불태워버렸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고상하면서도 겸허한 인품에 매료되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까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플라톤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과 노예로 태어나지 않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 특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스승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만날 수 있었음에 대해 이런 정도로 감사하다니, 그가 얼마나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위대한 스승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부당한 판결과 그에 따른 죽음은 플라톤에게 엄청난 충격과 환멸을 가져다주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로써 그는 민주주의를 경멸하게 되었고, 정치가가 되려는 꿈마저 깨끗이 단념하였다. 대신 스승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후세에 전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사형날짜를 기다릴 때, 플라톤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승을 구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 때문에 민주주의 당파 지도자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결국 소크라테스의 처형 직후에 위험을 느낀 그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메가라로 도망가서 숨어 지냈다. 플라톤은 디오니소스 1세를 만나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실현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전제군주는 플라톤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음모에 걸려든 플라톤은 노예시장에 팔리고 말았는데, 부자 상인이 그의 몸값을 치러줌으로써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아테네로 돌아와 그 돈을 갚으려 하였으나 받지 않자 헤로스 아카데모스 신전 근처에 아카데미아라고 하는 교육기관을 세우고,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저서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엮어나간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저작들은 약 50여 년에 걸쳐 방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중요한 것만을 골라보면변명,향연,파이돈,국가론,우주론,법률등을 들 수 있다. 80세에 죽자마자 당장 그를 신성시하는 전설이 생겼으며. ‘아폴론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플라톤은 자기 이전의 모든 사상(오르페우스 교리와 피타고라스 이론을 통하여 나타난 윤회 및 해탈에 대한 믿음)을 희랍적인 이성철학과 융합하였다. 또한 최초의 관념주의자로서 어떤 높은 이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하도록 인간들을 독려하고 있다. 에머슨(미국의 시인)철학은 플라톤이요,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했으며, 화이트헤드(영국의 철학자이자 철학자)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뜻풀이)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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