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 수필가

우리에게 과거는 되새김질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가장 맛있는 안주거리는 힘들고 배고팠던 옛이야기다.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과거로의 여행은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배고프던 시절은 우리 부모님들의 슬픈 노동력으로 해결되었다. 또한 사업가나 자영업자들에겐 조금의 부담으로 돌아가지만 노동의 대가 역시 많이 좋아졌다. 조그만 건물 건축을 계획하면서도 가장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비가 인력 비용이고 보면 건축현장의 소위 막노동 임금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변화는 직업에 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노동자의 피나는 노동권 회복 운동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기울어진 현상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사회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선진대열로 접어드는 길목에 들어선 모양새다. 하지만 커진 경제력의 위상에 비하면 아직 멀게 느껴지는 것이 정치권이다. 피로 일군 민주주의는 보수의 옷을 입은 유사보수주의자들이 말아먹고 언론에 자유를 부여하니 부를 향한 충성으로 스스로 언론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른바 후진국 형이다. 국민위에 정당이 있고 정당 위에 사욕이 있다. 이들의 특성은 목적이 공공에 있지 않으며 오직 자신만을 위한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법보다 자신의 사익을 숨긴 당익이 먼저고 세월호 사태로 자식을 잃은 피해자를 조롱하며 폭식 집회를 연다. 절대적인 집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슬며시 몇 개월 뒤의 총선에 발을 담그는 기관도 있다. 이들 사회악 집단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부류는 바로 가진 자들이다. 노동자 편에 서거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인 혹은 사회운동가들은 제거 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전태일이 싫고 김구도 싫다.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감히 덤비는 조국 역시 싫다. 문재인은 더욱 싫다. 특히 한국당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강하게 주장했던 사안도 문재인 정부에서 들고 나오면 조건 없는 반대다. 그래서 딱히 반대의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원내대표는 하루에도 거짓말을 몇 번씩 하고 당대표는 명분 없는 단식을 한다. 정치를 알지 못하는 일반인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사적인 집착에서 나온 퍼포먼스임을 안다. 그래서 단식 8일 만에 정신을 잃고 병원행이다. 10일 안에 병원을 탈출구로 삼을 것이라는 대중의 예견은 적중했다. 그만큼 얄팍하다. 대표의 단식을 이어가겠다고 나선 의원은 단 4일 만에 부축을 받으며 물러났다. 대단한 퍼포먼스다. 단식을 해봤던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단식 4일로 부축을 받을 정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한 통속이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언론과 재벌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기득권자들인 한국당과 검찰 권력은 같은 목적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과 향하는 발길이 같으면 무엇이든 용인하고 눈을 감아준다. 알아도 모른다. 동영상에 얼굴이 나와도 알아보지 못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월호 사태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도 재벌은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놀리는 단체들에게 뒷돈을 대주며 부추겼다. 세월호 유가족 단식 텐트 앞에서 소위 폭식투쟁과 온갖 조롱으로 사람의 한계를 넘어섰던 단체인 일베, 한국어버이연합, 자유대학생연합, 자유청년연합, 새마을포럼, 엄마부대, 교학연 등에게 수억대의 돈을 대준 단체가 바로 재벌 모임인 전경련이다. 지금은 탈퇴했지만 당시 전경련의 중심은 삼성이었으니 삼성이 이들에게 돈을 대주며 이 짓을 시킨 것이다. 피자를 먹으며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춤을 추던 그들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나는 아직도 피자를 먹지 않는다. 재벌과 권력의 제휴, 여기에 동조하는 언론의 모양새는 당연한 것인가. 서민은 이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한 시대적 엑스트라고 새로운 신분구조의 탄생이다. 며칠 전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후배가 이러한 모순적 신분구조를 옹호했다. 의사와 트럭 기사가 같은 대우를 받는 세상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많은 투자와 공부를 했으니 소위 자의 대우는 당연하며 트럭 기사는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직업에 따른 사회적 인식이 달라진다면 적성의 호불호가 직업이 되겠지만 지금처럼 신분의 척도가 된다면 해결은 어렵다. 노동의 대가가 공부에 비례한다면 사회적 신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소위 자 직업과 현장 노동자의 급여가 대등해지면 사회적 지위도 무너지고 힘든 공부만을 지향하는 부류도 즐거운 일을 선택할 것이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서민의 큰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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