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강제노역 당해, 피해보상이 아닌 조사차원 이해 필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을 추진하게 될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달 1일부터 시작한 일제의 강제동원피해 신고 접수가 6만 여건에 육박하고 있다. 그중 영광군 피해신고는 10일까지 670건이 접수되어 전남지역 최고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신고 내용을 근거로 지난달 21일부터 현장조사를 착수해, 이달부터는 희생자 및 유족 결정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그러나 광주와 전남지역 피해자가 7천여명이 넘어선 현재, 피해현장조사를 담당할 전담인력과 예산부족은 사실 확인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 질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영광군의 경우 10일 현재 군인 77건, 군속 93건, 위안부 1건, 노무자 499건, 등 총 670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됐다.


 


피해 신고가 이어지면서 안타깝고 억울한 사연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영광읍 학정리 이용희(81)씨는 1940년 사할린 탄광으로 징용당해 5년동안, 백수 홍곡리 김유환(82)씨는 43년 일본 군속으로, 대마 월산리 고제기(80)씨는 44년 징집되어 일본 토목공사장에서 인간이하 생활을 토로했다.


 


영광읍 도동리 정천년학씨는 누나 정태근씨가 43년 3월 공장에 일한다고 끌려갔다며 눈물로 호소한다.


 


한편 군 관계자는 “이번 신고는 피해조사 차원인데도 일부에서 보상을 받는 절차로 잘못 인식하고 있어 매우 걱정이 된다”고 밝히고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




  □김유환(82·백수읍 홍곡리)


영광 백수에서는 그때 19명이 함께 갔다. 당시 소화18년(1943년) 3월1일경으로 기억하며 도로 모였다가 평안남도 대동강까지 걸어서 움직였다가 그곳에서 우비로 배냥 만드는 법 등을 배웠었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이동한 후 바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이틀을 걸려서 갔다. 그곳이 규슈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고야로 가서 군사훈련을 계속 받았다. 밤이면 잠을 자야 되는데 폭격으로 인해 매일 잠을 못자고 밤마다 움직여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이제 저세상 사람이 된 같이 같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 때 함께 갔던 이들 중 이제 나 혼자만 살아있어서 서글프다. 군속으로 근무당시 심한 강제 노역으로 인해 신체장애를 입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후 농사일도 하지 못하고 병고로 시달리고 있다.




□신정기(82·영광읍 무령리)


그때를 생각하면 …. 나는 일정때 군대가고 대한민국 때도 군대가고 두 번이나 갔다.  43년 4월 15일경, 징병에서 갑(甲)종 합격으로 경기도 시흥 제3훈련소에 입소,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5일 경, 진해해군본부훈련소에 입소하여 6개월간 훈련을 받고 해병대 1등 수병으로 일본 요가시마로 전출되어 가게 되었다. 곡사포 조종사였는데 그때 당시 미국과 소련 전투기 공습이 계속 되어 가지 못했고  진해 해군본부에서 해병대로 계속 복무 중, 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동년 10월 15일 귀향하였다. 경기도 시흥 제3훈련소와 진해해병본부에서 해방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수 없는 구타로 허리와 우측다리 등의 신경통 장애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후유증 증세로 지팡이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다.     




□권희석(81·대마면 홍교리)


배가 고팠던 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대마 성산리 상금마을에 살 때 1년 동안 일요일마다 목총으로 훈련을 받았고 그 후 신체검사를 받았다. 을종을 받아서 군대에 가지 않는다 했는데 얼마 후 노무자로 일본에 가야한다는 통보가 왔고  1944년(21살)에 같이 징집된 일행들과 함께 일본 큐슈탄광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모른다. 배가고파서 일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해를 보지 못하고 일만했으며 먹는 것은 보리밥 조금에 단무지가 전부였다. 그것도 양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혹 식사시간이전에 밥을 먹다 들키면 몽둥이로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화약을 이용해  폭발하고 다시 그것을 긁어내는 작업이 계속됐으며 광복후 11월에 집으로 왔다. 배고팠던 기억 밖에는 없다.




□이용희(81.경기도 안양시)


  영광읍 학정리가 태생지로 1940년 1월 대보름날 당시 16살의 나이에 일본 탄광회사 간부에 의해 징집 당했다.


당시 학정리와 녹사리를 비롯해 신하리와 단주리 연성리 등지에서 끌려 나온 40여명은 현재 영광읍 도동리 농협동부분소 앞에서 집결해 장성에서 합류한 40명까지 합해 약 80여명이 징용 길에 올랐다.


영하 6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사할린 탄광에서의 강제 노역생활은 일본인들의 멸시와 괄시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포들이 부지기수 이었다.


탄광과 해군기지 공사장으로 끌려 다니길 5년, 그러던 45년 전쟁이 막바지에 몰린 일본에  징집당해 ‘조선 237부대원’으로 6월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 만주 전쟁터로 명령을 받고 부대 이동을 기다리다 광복을 맞았다.


해방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결혼해 자식들도 낳았다. 지금은 큰 아들(이종길, 53)과 함께 경기도 안양에 살고 있지만 그때의 고통과 기억은 생각자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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