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성지고등학교 1년 박설빈

"이놈의 가시내 그렇게 혼났어도 소용이 없어!" 11살의 나는 잠옷차림으로 시멘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어지는 발길질... "아빠! 다신 안그럴께요! 다시는 돈 훔치지 않을께요!"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며 으름짱을 놓고 뒤돌아 나가시는 아버지... 죄송스러움과 맞은 아픔에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다. 어릴 적의 나는 손버릇이 있었다.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고치지 못했던 나는 그날 밤 잠든 내옆에 엄마와 앉아 벗겨지고 멍든 팔뚝과 다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내 앞날을 걱정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19살이 된 지금은 손버릇이 없어졌다. 모질게 자식을 때리며 오직 자식 잘되고자 아픔을 참으셨던 아버지...

우리 아버지 고향은 경기도 성남이다.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군인이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셨다고 한다. 쌀이 없어서 하루에 한끼 밀가루 반죽으로 때우며 친구들과 놀 때도 어린 동생을 등에 엎고 어울리곤 했는데 넌 끼지 말라며 동생이나 열심히 보라는 친구들 놀림에 어린 아버지는 동생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꼬집으며 울었다고 한다. 한창 잘먹고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 동생을 얼르고 보살피며 키우다시피 한 아버지의 다른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잘 모른다.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5년을 한결같이 나를 기다리며 눈물의 나날을 보내셨다.

우리가족은 부모님을 포함해서 모두 일곱이다. 딸 넷, 아들 하나, 다섯의 자녀를 둔 아버지는 항상 맘 편할 날 없이 지내셨을 것 같다. 일찍 엄마를 만나 결혼해서 조용히 살고싶다며 전라도 나주라는 시골마을로 이사온 아버지는 '고생문이 열렸다'라는 말이 아버지를 위한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생했다. 훗날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시골사람들 인심이 험했다고 한다. 좋은 도시에서 이런 시골로 내려온 건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거다. 저 사람들은 분명 도둑질이나 사기를 쳐서 도망 온 것이다라고 수군덕거리며 엄마 아빠를 괴롭혔다. 미용기술이 있으셨던 엄마는 작은 집을 얻어 미장원을 차렸으나 가게가 잘 될 리가 없었고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던 아버지는 마땅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언니와 나를 데리고 시골로 오셨는데 이렇다할 집도 살림도 전혀 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유산되고 내가 5살 되던 해에 동생이 태어났다. 그 무렵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하셨는데 맞벌이 덕분에 나와 언니가 동생 우유먹이고 기저귀 갈고 재우고 숙제도 하고 때론 싸우기도 하며 지냈다.

현재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직업은 10개도 넘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돈벌이가 안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가스배달, 택시운전, 점원, 집배원, 주조장, 우물 파는 직업 등 셀 수가 없다. 우리 부모님은 싸움이 잦았다. 툭하면 말다툼 끝에 가서는 고래고래 소리까지. 언제나 이기는 쪽은 엄마였다. 싸우다가도 "당신이 돈이나 제대로 벌어왔어?" 라는 엄마의 말에 할말을 잊고 금새 풀이 죽어버리는 아버지. 난 언제나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다니던 우체국 국장이 마음에 안 든다며 집배원 일을 그만두시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신 아버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사에만 매달리셨다. 그 무렵 나는 왕따를 당해 전학을 갔는데 나쁜 친구를 만나 이른바 날라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에 대한 걱정에 세상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라며 좋은 말씀도 해주시곤 했는데 이미 몇 걸음 내딛고 있었던 나에겐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공들인 농사가 장마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망연자실하던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도 농사를 지으셨는데 또 망쳤다. 엄마랑 한바탕 싸우시곤 그 다음해에는 다른 사람의 배밭을 대신 돌봐서 이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과수원 일에 도전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라는 생각에 목이 메인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시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실업계 쪽을 원했던 나로서는 반항했다. 무단결석, 무단조퇴를 되풀이하다 결국엔 학교에서 자퇴를 권했고 부모님이 학교로 찾아와 빌고 또 빌어 나를 살렸다. 그러나 나는 5월 7일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가출했다. 일주일만에 남자친구 집에 있던 나를 찾아내 새빨개진 얼굴로 내 뺨을 후려치시던 아버지. 그리고 나를 차에 태우고 굳은 옆얼굴만을 보여주시던 아버지를 나는 자꾸 내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집을 떠나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새학기가 시작되는 아직 찬바람이 불어대던 봄이었다. 그 전보다 훨씬 핼쓱해진 모습으로 날 반기시며 니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토닥거려 주시던 아버지의 기대를 져버리고 복학한지 넉달만에 집을 나오고 말았다. 고삐를 잡지 못한 미친 망아지였다. 나라는 녀석은...

엄마 말론 말은 안 하셨지만 내가없는 또 한번의 일년동안 아버지는 먼 산을 바라보며 때론 동생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한다. 그리고 맡아오시던 배밭도 태풍이며 물가에 적자를 보셨다. 한 마디로 돈 한푼 못 벌고 농약값에 인력값에 손해보는 일만 4년째 하셨던 것이다. 엄마는 물론이고 우리들도 아빠에게 지쳐가고 있었다. 4년간 땡볕에서 말도 못하게 고생하셨던 아버지의 하얗던 얼굴은 어느새 흑인 마냥 까매지셨고 그 까만 얼굴 때문에 철없던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자리가 한없이 창피하기만 했다.

그러던 작년 9월 추석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맑고 아름답던 눈물. 나의 온몸을 적셔 오열하게 만들었던 아버지의 눈물은 엄마와의 말다툼에서 시작되었다. 또 어김없이 나온 돈 이야기. 무척이나 힘드셨던 아버지는 홧김에 이혼하자는 엄마의 말에 말없이 집을 나가셨다. 친구분 집에나 가셨겠지 하며 신경 안쓰고 있던 우리 가족은 밤12시가 넘어가서부터 소란스러워졌다. 설마설마하다 파출소에 신고하고 동네며 산이며 아버지를 찾아 소리를 질러대며 울었다. 내가 나가 죽으면 되는거냐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살하시는 건 아닐까 정말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지쳐서 새벽 4시쯤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대문 한쪽 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못 마시는 술을 두병이나 드시고 정신을 못 차리시던 아버지. 안도의 한숨과 불쌍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워서 굵은 눈물을 흘리시며 '설빈아 내딸 설빈아, 어디 갔다 왔니!"를 연신 되풀이하시며 미안하다고, 아빠가 능력이 없고 못나서 너희들한테 제대로 해준 것 하나 없다고, 아빠 자격도 없다고 울부짖으시던 그 모습에 가족 모두 아버지의 아픔을 뼛속 깊이 느꼈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골프장 공사 현장에 다니신다. 일당 5만원을 받는 막노동이긴 하지만, 무엇인가에 다시 도전하며 가족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주름잡으며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물론 나도 다시 시작한 학교에서 열심히 다니며 꿈을 만들어 가고 있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나부터 자신감을 갖고 맡은 일에 충실하면 저절로 찾아오는 게 행복이고 진정한 삶이라는 걸 이젠 좀 알 것 같다. 골프장 공사가 끝나는 대로 아버지는 과장이 되신다고 한다. 사장님이 아버지의 성실함을 높이사서 월급제로 채용해 주신다고 했다한다.

우리 가족 모두는 아버지를 믿는다. 험하고 괴로운 길을 끝내 견디며 모질게 살아오셨던 아름다운 남자. 아버지... 못난 딸이지만 기다려 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의 그 소중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이제는 내가 더 큰사랑으로 되돌려 드리려 한다.

지금 아버지가 나는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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