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의병의 발원, 대마면 화평리 '호남창의회맹소'의 설치와 의병장 김용구

이 고장의 대표적인 한말 의병장 후은 김용구선생,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부터 기삼연과 내왕하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여 동지들을 모아 일심계(一心契)를 맺고 자주국권 실현을 위해 실천 방안을 논의한 인물, 그의 관향은 상산이며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서 이 지역 대마 화평리 출신이다.

선생은 1907년 8월 8일 기삼연과 함께 비밀리에 국사를 도모하며, 무기를 운반해 두었다가 일이 사전에 누설되자 성공하지 못하고 수련산(秀蓮山: 장성군 동화면)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많은 의사들을 모아놓고 피를 뿌리며 단에 올라 천지에 맹서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며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했다. 이 회맹소 직속 의병대의 대장에는 연장자인 기삼연선생이 추대되고 김용구선생은 통령(統領)에 임명되었다. 그 호남창의회맹소는 예하에 참모 깁엽중, 김봉수, 종사 김익중, 서석구, 전수용, 정재 이석용, 선봉에 죽봉 김태원, 중군에 이철형, 후군에 이남규, 운량 김태수, 총독 백효인, 감기에 이영화, 좌익 김창복, 우익 허경화, 포대 김기순 등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의 인물들이 후에 각기 따로 의진을 구성하여 호남의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남창의회맹소의 의의는 적지 않으며, 특히 호남창의회맹소의 모체인 일심계가 바로 이 곳 대마면 화평리 선생의 생가에서 태동하였다는 사실은 항일의병의 발상지가 호남이요, 항일 호남창의의 발원이 바로 이 고장 영광이었다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들은 격서문을 작성해 대중이 의병운동에 동참해 나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천명하고, 적에게 도움을 주는 자의 처단과 재산몰수를 경고했으며 격서문 곳곳에는 호남창의 회맹소에 가담한 의병들의 국권을 상실한 울분과 우국충정, 항일 투쟁의 결연한 의지가 점점이 배어 있다.

김용구 선생은, 1907년 8월 11일, 동지 박용근과 함께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다음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적에게 패하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의로운 이들을 찾아다니다 구례 지리산 상봉 토굴사에서 의병장 고녹천(高鹿泉)을 만나 나라의 살 길을 의논한 후 다시금 항일전투를 개시하게 된다. 그후 선생은 장성, 영광, 영광,함평 등지에서 주로 적과 교전하였고, 12월 중순 선운사에 머무를 때에는 그의 외아들 기봉이 합류하지만 13일 흥덕 안치전투에서 안타깝게도 아들을 잃는 비운을 겪는다. 12월 28일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고서 그 이듬해 4월까지 일제에 맞서 숱한 전투를 치르며 빛나는 전적을 거둔 선생은 1908년 4월 17일 와공면 유동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의해 부상을 입자 군권을 모두 박도경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선생은 장성 백암산으로 들어가 3∼4년을 숨어 병을 치료하지만 적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훗날을 기약하며 1911년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입산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울분과 지병이 극에 달한데다 고종이 승하했다는 변고를 듣고 음독, 1918년 12월 21일(음력) 절사(節死)했다.

정부에서는 김용구선생의 공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김용구 선생의 항일(抗日)일지

-전적을 중심으로



□1907년

8월 26일 화개시(花開市)에서 왜적 10여명 포살, 이튿날 칠불사(七佛寺)에서 적 수명 포살

9월 6일 연곡촌(連谷村)에서 적병 10여명 포살

9월 16일 문수사(文殊寺) 적 10여명 사상

9월 25일 무장(茂長)내에서 적병을 무찌르니 적 모두 도주

9월 26일 고창(高敞)읍내에서 2차에 걸쳐 적과 접전 30여명사살

11월 3일 법성포(法聖浦)에서 적10여명 살해, 왜적이 살던 집 방화하였으나 그들의 재화(財

貨)는 추호도 범하지 않음.

11월 5일 장성(長城) 오동촌(梧桐村)에서 적병 20여명 포살

11월 7일 백양사(白羊寺에)서 30여명 적 살해

11월 19일 함평(咸平) 선치(蟬峙)에서 적10여명 살해

12월 2일 내원리(內院里)에서 적 15∼16명 포살

12월 13일 고부 인촌리(仁村里)에서 적병 40명 사살 적 후퇴

12월 15일 죽림리(竹林里)에서 적 15∼16명 포살

12월 27일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적 1백여명 포살, 아군 사망자 30여명



□1908년

2월 19일 고창읍내에서 세무주사 서상달 포살

2월 20일 장성 토정리(土井里)에서 적병 50여명 포살

2월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10여명 사살

3월 2일 영광 오동리(梧桐里)에서 적과 접전 전과를 올렸으며 나머지 적 도주

3월 12일 구수산에서 적의 마병(馬兵) 10여명 보합(步合) 20여명 사살

3월 23일 영광 홍농면 대덕리에서 적과 접전 수명 사살

4월 11일 무장 선운사(禪雲寺)에서 접전 적 수십명 포살

4월 17일 무장 와공면 유동(儒洞)에서 적 수십명 사살, 적의 총탄에 부상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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