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들여다 보기

곽일순 영광방송 제작국장

죽음과 묘의 이름

우리 주위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애경사(哀慶事)이다. 그중에서도 결혼식과 장례식인데, 결혼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웬만한 사람은 결혼식 한번 마치고 나면 3Kg 정도 몸무게가 주는 것은 보통이다. 그만큼 이리저리 복잡 다난한 문제로 시달리고 나면 다시는 결혼 같은거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래도 결혼은 장례에 비하면 가볍다. 죽음은 간단하지만 뒷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경험이 없으면 이건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집안 어른이나 동네 어른이 안계시면 막막 그 자체이다.



죽음의 구별

하지만 옛날에는 엄격한 신분 사회이다 보니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은 아니었다. 신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지위의 척도였지만 죽음 앞에서도 엄연한 사회에서의 위치요, 잣대였다. 즉, 죽어서도 신분은 고스란히 남아 적용되었던 것이다.

먼저 죽음의 이름이 달랐다. 옛 기록을 보면, 황제가 죽었을 경우 붕(崩)을 사용하여 붕어(崩御)라 하였으며, 제후(諸侯)나 왕공(王公), 귀인(貴人)의 죽음은 훙(薨)을 사용하여 훙거(薨去). 훙서(薨逝). 훙어(薨御)라 불렀으며, 대부(大夫)가 죽은 경우에는 졸(卒)을 사용하여 졸거(卒去)라 하였고, 그 외 일반인이 죽은 경우는 사(死)를 사용하여 사망(死亡), 혹은 사거(死去)라 불렀다. 요즈음 대통령이 죽으면 서거(逝去)라는 말을 사용한다. 얼핏 들으면 대통령에 대한 특별한 죽음의 대우에서 나온 단어인 듯도 하지만 사실은 일반인에게 사용하던 사거(死去)를 조금 높여 부르는 말로서, 일반인의 죽음의 명칭이니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조금이라도 높여 부르고 싶은 마음에서 부르기 시작한 죽음의 이름이고 보면, 현대의 민주화 시대에서는 황후와 장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높여 부르고 싶은 궁여지책은 여기에서도 잔존하는 듯싶다. 여하튼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의 지배층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반인과는 차별을 원하였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현대는 차별(差別)이 아닌 차이(差異)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지위는 재력에 의한 세습이다. 유교 사회에서의 신분적인 세습과는 모습을 달리 하기는 하지만 차별이 아닌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재벌이나 사용자의 자식은 일반 노동자의 한달 급여를 하루 용돈으로 쓰면서 놀아도 넉넉함의 극치이고, 노동자는 그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 놀고 싶으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제살 깍아 먹기로 들어 갈 수밖에는 없음이 현실이다. 물론 자수성가 형의 알찬 당사자들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의 자식들을 말함이다. 태어남이 이리 다르니 죽음의 의식 또한 다름은 불문가지다. 이것은 재력으로 정해지는 현대의 척도요 세상의 잣대이다. 오히려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의 신분적 차별보다도 더욱 혹독한 것이 요즘 재력상의 다소에서 오는 차이이다.

자본가들의 식솔은 놀고먹는데 익숙하다 못해 새로운 소질까지 개발해 내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의 해고 정리의 시퍼런 칼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임금 깍아 먹는 휴식 조차도 반납하며 살아야 하고 초라한 죽음의 의식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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