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읍 대전리를 지난다. 차량으로 5분 정도 달리자 길은 백수 상사리에 닿고 지난해 완공된 상사리와 염산면 신성리를 시원스레 뚫어놓은 신작로와 연결된다. 그 길을 따라 도보로 5분여... 해풍을 막아주듯 병풍처럼 서 있는 시골초등학교(백수 남초등)의 소나무 숲이 인상적인 마을로 진입할 수 있다. 조선조 한양의 도성이었던 한성(漢城)을 연상케 하는 상사리 한성마을이다.

깨끗하고 바둑판처럼 잘 다듬어진 길, 그 길을 따라 마을 중앙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네 그루로 애워 쌓인 정자가 한눈에 들어오고 게이트볼 경기장이 잘 정비돼 있다. 하수구정비도 여느 농촌 마을 보다 잘 돼있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한성마을의 첫 느낌은 마치 전원마을의 모범을 보는 것처럼 청결하고 쾌적하다.

이 마을은 본래 1961년 5.16군사혁명이후 귀농정착민(歸農定着民)으로 형성되었는데 정착민 대다수가 서울 쪽에서 왔다하여 한성(漢城)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그 때 이주해 온 140세대중 39세대는 평산(平山)에, 101세대는 이 마을에 정착했다. 하지만 당시 주민들은 거개가 이곳을 떠났고 지금은 6세대 정도만 남아있다.

당시 초기 정착민들은 나라의 귀농정책 지원으로 1세대당 논 2정보씩, 130만원의 정착금을 받아 새 집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이주해온 그 해 그들이 짓고 살았다는 거의 모든 집들은 이미 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러나 그때 지어진 가옥 세 채만이 남아 40여년의 풍상을 맞으며 이 마을 역사를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인근 면민들이 건너와 새 터전을 마련했는데 정재성 이장에 따르면 '수년전 160세대까지 이르렀으나 이농으로 인해 지금은 101세대, 284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41년전, 정착민들의 세대수와 똑같은 세대를 구성하고 있는 한성마을, '우연의 일치라지만 어쩌면 이렇게 꼭 맞아 떨어 질 수 있을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41년의 역사를 헤아리듯 이 마을에서는 마을 탄생의 날을 기념하여 마을의 날 행사가 8월 23일 성대히 치러진다. 초기 정착민들이 이곳에 도착한 첫날이 8월 23일이었으니 그날이 한성마을의 '귓빠진 날'인 셈이다. 어디가나 마을의 날이 있게 마련이지만 한성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이 '마을의 날'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은 특히 자랑거리가 많다. 농업소득이나 생활개선의지와 실천에도 앞서가는 마을에 든다. 단적인 예로 농협 출자분야에서 2000년과 2001년 2년연속 우수마을로 선정돼 상금을 받는가 하면 군 건강관리실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마을 건강관리실을 알차게 운영해오고 있다. 한성 마을 건강관리실은 마을주민들의 체력단련장이면서 또 주민회합의 장이다.

그곳에서는 부녀회원들이 노인생활 지도마을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한지공예, 우도농악을 배우고 재생비누를 만들기도 한다. 또 노인생활체육의 붐을 조성하고 있는 게이트볼 구장이 바로 앞에 있어 선수들과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 게이트볼 마을 선수단(회장 양풍송)들도 군대회에서 두차례나 우승한 적이 있는 수준급에 올라 있다.

그리고, 지난해 말 군이 실시한 마을 인센티브제 최우수마을로 선정돼 마을발전 격려금으로 2천5백원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그 기금으로 올 한 해는 미진한 하수공사와 마을길 도로 포장에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한성마을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마을은 아니지만 자기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의 질도 이곳에서 더욱 향상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수십년 전 근면과 검소를 신념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억척스럽게 새 삶을 열어 이룩한 터전, 척박한 간척지 땅을 개간하여 일어섰던 선배들의 그러한 정신과 땀과 노력이 한성 마을 사람들 가슴에 아직도 살아 숨쉬고 또 그것이 한성마을 사람들의 삶의 이유이자 그들을 꿋꿋하게 이끌어주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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