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아기







잠꼬대 하는 설레에 보던 글줄

놓치고서



책을 방 바닥에

편채로 엎어 놓고



이불을 따둑거렸다

빨간 볼이 예쁘다.







해설

이 시조엔 자신의 혈육인 아기에 대한 부정(父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운의 몇째(옥형, 나나, 홍재, 청재, 명재) 아기인지 몰라도 '잠꼬대 하는 설레'라는 초장 첫 구에 나타난 것처럼 약질로 태어난 아이인 성 싶다.

(튼실하게 태어난 아이는 그다지 잠꼬대가 심하지 않음)

한참 맛붙여 책을 읽는데 아기가 잠꼬대 하거나 보채면 그 맛이 싹둑 달아나버리니까, 조운은 어쩌든지 다시 재우려고 이불을 다둑거렸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독서광이었는지 다른 시조에도 나와 있지만 필자가 1988년 8월에 서울에서 내려온 조영순과 함께 가 생질녀 이향백(조운 셋째 누나 딸)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엄청난 양의 책이 방에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49년 12월 월북한 이후로도 주인 잃은 책은 그대로 있었는데 6.25때 경찰서에서 나와 몇 대의 리어커로 압수해 갔다 하니, 모르긴 해도 수 백권이 넘을 성 싶다.

박화성도 조운의 서재에 “小說作法”, “詩作法”, “희곡작법” 외에도 “러시아문학”, “서구문학”, “작품집”등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책이 귀했던 시절 책이 이처럼 엄청났다는 건 조운의 지식욕도 놀랍지만 보기도 아까운 외아들의 먼 장래만을 생각하며 이틀 먹을 식량이 없는 가난에서도 조운을 뒷받침하는 어머니의 배려가 어떠했는가 능히 짐작할 만하다.

(없는 책은 가람과 친구(조용남)한테 빌려다 봤음)

조운은 자신이 읽은 책을 후배들이 놀러오면 꼭 꺼내주며 책 읽기를 권장했는데, 노규창한테는 “고사통” “조선역사”를 읽으라 하고, 그의 단짝친구 조용남(曺龍楠)한테 책을 빌려오고 가져다 주는 심부름을 시켰으며 그의 집안 일가 동생벌인 조의현(曺宜鉉)에게도 독서 하기를 권장했다 한다. 초정은 필자에게 초등학교 5.6학년 무렵부터 조운이 건네주는 책(처음 책: 카츄샤)에 심취해 자주 갔었노라고, 훗날 시조 문학을 하는 계기가 되었노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비단 초정뿐만 아니라 현암 이을호(李乙浩), 조남령(曺南嶺), 정종(鄭?)도 어릴 적부터 조운의 입김이 서린 직계 후학들이다.

실례로 조운을 스승으로 섬겼던 조남령의 시조 한 수를 소개하면









내 살이 아니라고 어이 아니 아프겠소

내 몸이 아니라고 어이 아니 치읍겠소

덜덜덜 창 떨 때마다 마음 저려 하외다.



(1939년 7월 문장지에 발표된 이 시조는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조운을 그리며 일본에서 쓴 것임)









寒 窓







두부장수 외는 소리

골목으로 잦아지자



뻘건 窓볕이

어슨듯 그므러져



쪼이든 화로를 뒤지니 불은 벌써

꺼지고.





해설

이 시조는 1937년 6월 “朝光” 잡지에 “雪窓”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겨울날 방안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초장에 나오는 골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데, 초장 “골목으로 잦아지자” 구절은 조운 집이 막다른 골목이어서, 두부장수가 되돌아 가면서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여겨진다.

두부장수가 “두부 사려” “두부 사려” 청승맞게 목청을 돋구며 두부 팔러 다니는 때는 콩 수확이 끝난 늦가을부터 인데, 이때는 방안에 있어도 한기(寒氣)가 엄습해 화롯불을 곁에 두고 있기가 십상이다.

그런 화롯불이 수명을 다하고 강그라져 버렸으니 몸이 부실했던 조운이 오싹 추위를 느꼈을건 자명하다.

방안에서 무엇에 몰두했는지 알 수 없으나 두부장수 외는 소리에 하루가 저물어 가는 줄 알고, 미심쩍게 화롯불을 뒤지니 불은 벌써 꺼져 있었노라고...

우리 속담에 오뉴월 볕도 남주기 아깝다고 하는데, 노루꼬리만한 겨울볕이 어슨듯 그므러져(어리는 듯 하다 사라져) 버렸으니 한기(寒氣)를 싫어한 조운으로서는 당연히 이런 시조가 나올 법하다.















천년에 하루씩만

별밤이 있다 하면



기나긴 겨울밤을

선 채 얼어 굳을망정



우러러 꼬빡 새고도

서오하여 하렸다.







해설

이 시조는 나면서부터 기구(崎嶇)한 운명과 맞서는 그의 인내력과 결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남(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천년에 하루만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걸 위해 내 모든 걸 다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서운해 하렸다“ 라고 했으니...

흔히 인생은 행복이니, 성공이니, 출세니, 부귀영화니, 이런 말들을 곧잘 하지만 조운은 그걸 쟁취하려거나 향유하려 하기보다는 일생에 딱 한순간만이라도 꿈이 이뤄진다고 하면 그걸로 만족 하겠노라고 하였으니, 이미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초월한 인생의 달관자(達觀者)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뺨에는 이슬이오

가지에는 꽃이로다



곱게 쌓여노니 미인의 살결일다



비단이 밟히는 양 하여

소리조차 희고나.







해설

이 시조는 한번만 읽어도 과연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빼어난 수작(秀作)이다.

그의 감수성과 미적 감각이 얼마만큼 탁월한지 재삼 각인(刻印)시켜 준다.

이슬로, 꽃으로, 살결로 언어의 마술을 부려 맘대로 눈(雪)을 바꿔치기 해놓고 끝에 가서는 소리조차 희고나 라고 했으니, 아연실색(啞然失色), 기절낙담(氣絶落膽)이란 말이 뺨맞고 달아날 정도다.

이렇듯 단 몇 마디 말로 가슴 뭉클한 감동의 강펀치를 구사할 줄 아는 조운이야말로 천부적인 언어의 마술사임이 분명하다.

(백년에 한명, 아니 이백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조운 시조가 음식 같으면 첫 숟갈에 입댈 맛이 나고, 끝에 가서는 또 뗄 맛이 그만이다.

무슨 글이든지 첫 줄부터 눈을 끌어 당기는 맛이 있어야지, 술에 물탄 듯 그렇고 그러면 끝까지 인내하며 보아 줄 사람은 흔치 않다.

또, 화룡점정(畵龍點睛)에 해당하는 끝마무리가 시원찮해 여운이 없다면 시(시조)를 빚는 솜씨를 터득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문장력이 뛰어난 시인이나 작가들은 처음부터 글을 이끌어 가는데도 빈틈 없지만 끝마무리에 고심하는 줄 모른다.

또 조운의 시조를 서예에 비유해 말하자면 서예의 대가(大家)가 듬뿍 먹을 찍어 한 호흡에 쓴 일필휘지(一筆揮之)나 다를 바 없고, 그림으로 말하면 동양화의 원로(元老)가 요긴한 부분만 살짝살짝 드러내 한껏 여백미(餘白美)를 살린 작품과도 다를 바 없다.









雪月夜







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 대로 가고 싶다



이길로 가고 나면

어디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







해설

이 시조가 1934년 3월 “신가정”에 발표될 때는 어느밤으로 제목이 되어 있는데, 1947년 조운시조집에 실릴 때 “雪月夜”로 바뀌었다.

“어느밤”이라고 하면 시조의 배경을 모르는데 “雪月夜”로 하면 세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형성된다.

그래서 고친 성 싶다.

영광은 타지역에 비해 눈이 후북이 오는 지역이어서 “여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눈 위에 달 밝은 밤은 누구라도 얼른 잠못 이루고, 이리 궁글 저리 궁글 하다, 밑도 끝도 없이 누가 “좀 나온나이” 하기만 하면 얼른 달려나갈 것 같은 아니, 혼자서라도 끝없이 하얀 눈길을 걷고 싶은 그런 밤이리라.

조운은 이 “雪月夜”로 하여금 정처없이 가고 싶은 자신의 방랑성을 말하고 있으며, 고뇌에 찬 사나이의 그림자까지 그리고 있다.

종장 “먼 말에”는 “먼 마을”로 봐야 하며, 여기서도 종장 첫들머리 세글자를 지키느라 말을 줄여 쓴 것 같다.

초, 중장은 조운의 심경이고, 종장은 그의 기분이 어떻든 이전의 밤처럼 오늘밤도 깊어진다고, 무심하고 야속하고 괴괴한 밤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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