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성포로 가는 길

탱자나무 울타리로부터 시작되는 남국(南國)의 다사로운 감촉이 너무나도 선한 송정리. 아직도 서울로부터 온 기적소리의 여운이 그대로 가슴에 남아 있는데 버스는 여기 송정리로부터 준마처럼 영광 법성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차창 밖으로 황룡강의 조용한 물빛과 대밭의 아침안개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노령산맥의 산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여기 함평군 해보면 문장리에 와도 이젠 아침이슬을 밟고 논길을 가는 황소의 풍경소리와 장죽(長竹) 도포(道袍)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길 그대로 지키던 늙은이들을 볼 수가 없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깜빡이며 담벼락에 서성이며 침선(針線)과 내서(內書)로 전통을 지키던 이 고장 이 산 마을엔 주택개량의 망치소리가 들리고 새마을 운동의 깃발만이 펄럭일 뿐이다. 순식간에 버스는 함평 영광의 군계(郡界)인 밀재에 올라선다.

불갑사의 해불암으로 가는 길이 아카시아 꽃 속에 묻혀 있는 밀재. 영광사람들의 숱한 서러움이 한없이 맺혀있는 밀재. 영광군수로 부임하던 수령들이 오기 싫어 눈물뿌리며 부임하여 왔다가 또 떠나기 섭섭하여 피눈물 뿌리며 떠나갔다는 밀재. 이 밀재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際)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펼쳐지는 칠산바다와 서해로 이어지는 연봉 구수산 밑에 오밀조밀하게 깔려 있는 야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밀재에서 버스는 고개를 넘고 또 고개를 넘어 넘어 산협이 갑자기 트인 조용한 분지에 자리한 고을 영광에 닿는다. 이 영광고을은 이른봄이면 실낱같은 안개가 자욱히 끼어 하나의 묵화와 같은 경치를 이룬다. 원래 백제 때는 武尸伊라 불러 왔던 것이 이조에 와서 정주(靜州) 혹은 무령(武靈)이라 불러온 곳이다.

영광으로부터 서북으로 10km 떨어진 곳에 버스로 30여분간 달리면 영광 굴비의 본고장인 법성포에 닿는다. 법성포 부두에서 건너다 보이는 옥녀봉에서 원불교의 성지(聖地)로 이어지는 능선의 오솔길이 첫눈에 띈다. 능선엔 아직도 굴 껍질이 바위허리를 휘감고 있어 옛날에는 바닷물이 그곳까지 닿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까투리가 날아간 뒤의 여운에 취해 조용한 감상에 젖어있노라면 어느새 밀물이 법성포 초입에 있는 와탄교 다리까지 밀려와 건너편 대치미 구수미의 등불 빛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법성포를 둘러싼 완연한 산과 잔잔한 바다는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성장(盛裝)하기 시작한다.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능선과 능선사이에 자리한 산 마을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룻배에 부서지는 물보라가 꽃처럼 아름답다. 방파제 안으로 밀물이 가득히 몰려 송시열의 휘호(揮毫)가 남아 있다는 은선암(메바위, 응암바위라고도 함)까지 흐르는 물굽이가 호수를 연상케 하는데 옛부터 이를 가리켜 소서호(小西湖)라 하였고 달 밝은 밤이면 와탄교로부터 은선암 옆을 스쳐 옥녀봉 아래까지 배를 띄워 내려오면서 풍악을 잡아 풍류를 즐겼다 한다.

2. 가마미 해수욕장

법성포 인회산의 솔밭을 옆으로 끼고 돌면 가마미 해수욕장을 향하는 푸른 길이 나온다. 산등성이로부터 여기저기 산길을 따라 누워 있는 보리밭이 바닷바람에 출렁이며 물결쳐 비단 이불처럼 눈부시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산길을 가노라면 홍롱산 등성이에 깔려 있는 기암괴석이 바닷바람에 그을린 눈을 부릅뜨고 저 멀리 가물거리는 천정산성까지 그대로 달려가는 것 같은 환상이 스쳐간다. 서서히 썰물이 된 늪을 옆으로 끼고 돌아, 파시(波市)가 지나간 뒤의 정적(靜寂)처럼 고요한 갯마을 목냉기를 끼고 돌면 갑자기 끝없는 시야가 펼쳐진다.

망망한 칠산바다에는 조기잡이 배가 아득한 수평선에 늦가을 은행나뭇잎처럼 은빛으로 가물거리고, 바로 발 밑으로는 「전라도의 와이키키」라 불리워지는 일만여평의 하얀 백사장이 비단 치마폭처럼 펼쳐진다. 백사장 모래펄에는 강강수월래의 원무를 연상시키는 반월형의 솔밭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선녀가 금방 날개옷을 벗어 놓고 내려와 있을 것 같은 모래밭과 출렁이는 파도를 쫓아 서성거리노라면 바닷바람과 솔바람이 목을 휘감아주고 마음과 몸은 한없는 즐거움으로 가벼워진다.

※ 이 글은 「영광의 노래(1991년)」에 수록된 향우작가 송석래님의 수필을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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