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현 선생의 호는 초정(草情)이다. 영광읍 백학리 만석군의 가문에서 태어난 초정은 서울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릿교오 대학 영문학과와 도오샤대학 경제학과 두 개의 전공학위를 취득한뒤 귀국했다.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초정은 선각자 대열에 동참하며 민족애와 교육구국의 정신을 바탕으로 주로 시창작과 교육자로 활동했다. 일제치하의 억눌림 속에서 지역 선후배들과 함께 지역 문화발전과 교육 사업에 관심을 쏟은 초정은 광복이 되자마자 동지들과 뜻을 모아 남녀중학을 설립하고 여자중학교의 직접 교장직을 맡아 운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역정서를 주도했던 선각자들이 대개 고향을 떠나자 초정선생의 외로운 삶이 시작됐다. 특히 초정 선생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늘 조운 선생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조운 선생이 48년 월북하고 난 뒤 작품활동 뿐만 아니라 인생마저 포기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정신적 시련을 겪었었다 한다.

초정 선생은 술자리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를 취하게 하고, 흥겹게 해주었던 호인이었던 모양이다. 해학이 장마철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 취기가 어린 독설들도 결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그와 가까웠던 후배들은 전한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유고집 「창(窓)」에 수록- 1997년 영광향토문화연구회 편>은 주변의 경관과 사계절의 아름다운 자연을 일상소재로 이끌어 내고 있다. 섬세한 관찰력과 탁월한 수사력을 발휘한 그는 조운 조남령과 더불어 영광땅 3대 시조시인으로 손꼽힌다.

초정은 이렇듯 시조시인 조운의 뒤를 이을 문재(文才)였으나 평소 호화스러웠던 젊은 시절을 내세워 본 일도 없었고, 주옥같은 시를 쓰면서도 시인이라 자처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진지한 인간미를 보여주어 이 고을 많은 이들에게 어버이처럼 때론 스승처럼, 또 어느때는 동지처럼 느낀 존재로 살았던 인물이었다. 이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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