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의 본향, 효마을 사람들

장암산 언저리를 흐르는 안개의 군무가 잠든 효동마을을 감싸며 깨운다.

아침 안개의 속살을 비집고 저만치...40여호 마을집들을 굽어보고 있는 굵은 주엽나무 가지가 손을 내민다.

낯설다.

1980년대 후반 만해도 옛 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던 묘량면 삼효리 효동마을.

초가지붕, 돌담. 옹기그릇....

개발이라는 단어와는 거리를 둔 것만 같았던 전통의 마을, '효동'. 하지만 이 마을이 보여주던 고풍스런 모양새는 이제 작품사진 속이나 영화 속 한 장면에서나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의 출세작 '백치 아다다'나 향토사진 작가들이 남긴 사진틀 속에서 말이다.

효동은 과거 일제시대 때만해도 가구수가 110호에 달했지만 이제는 마을 인구 모두 헤아려도 120명. 그 중 60세 이상 노인이 반이나 차지하는 전형적인 현대농촌 마을이다.

마을머리에 오랜 역사와 부흥을 얘기해 주듯 수호신처럼 고인돌 세 기가 사이좋게 서있다.

마을 한 중심, 지난해 봄 준공된 경로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곳에서 들려오는 나이 든 아낙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이 마을 남정네들을 만나 시집살이 시작한지 30∼40년을 훌쩍 넘겨버린 아줌마들, 초로의 중년여성부터 80이 다 된 할머니까지 옹기종기 둘러앉아 마늘을 까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중 유독 말심이 좋은 한 여인네가 눈에 띈다. 이애희씨(67), 이 여인은 처가도 여기, 시댁도 여기인 사람.... 남편 정진수씨(67)와 위 아래집 담 하나 사이로 자랐고, 서로 울타리 구멍으로 내다보며 연정을 품게 됐다는 이씨의 농짙은 연애담에 모두들 신이 났다. 이 마을 타고난 재담꾼이며 소리로는 일가견이 있다고 소문난 정택규씨의 논메는 소리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염산댁 아주머니는 읍내서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상을 봐왔다.

신선한 몬치(숭어새끼) 한 접시와 갓지, 파지가 엉글어진 반찬사발이 허물없다. 거기에 소주 한잔 빠질 수 없다. 몬치 대가리부터 김치를 돌돌 말아먹는 겨울 숭어의 맛이 별미인데다 이 분 저 분 돌아가며 건네는 술인심에 금새 취기가 오르고...

삼효리는 본래 묘장면에 속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1910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석리, 석전리, 흑석리, 몽강리, 광동, 효동, 창동과 마촌면의 용동 일부가 합쳐져 묘량면으로 편입된 마을인데 누가 봐도 이 마을들 중 삼효리의 근원은 효동이랄 수 있다.

영광군 유도회장을 맡고 있는 정영준(71) 효마을 노인회장을 만나 이 마을 자랑 좀 해달랬더니 정회장은 대뜸 "우리 효동은 누가 뭐래도 삼효리의 으뜸 마을이라네.. 조선 선조때 효자 3 형제가 살았다해서 삼효리였다는디.......지금껏 그 사연이 구전되지 않아서 아쉽긴 하지만 정신적 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실 선조조 효자 3형제에 대한 확실한 고증은 없다. 문헌에 실리지 않아 증명할 길도 없으나 이 마을을 형성하고 수 백년을 살아왔던 조상들의 삶 속에는 이 마을지명의 유래가 된 효(孝)에 대한 어떤 감동적인 일화가 반드시 숨겨져 있을 법도 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삼효리란 마을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얼마 전 한국 효도회에서 장한 어버이상을 수상한 정휴대(85)씨도 한목 거든다. "지금도 효동마을 자손들은 다 효자들 아니겄는가?

80년대부턴가 향교, 전남유도회, 영광군, 한국효도회 같은 디서 뽑은 이 마을 효자 효부들이 열 사람이나 돼야...."

효부, 효자 뿐만 아니다. 작은 마을이라지만 묘량에서 최초로 행정고시합격자 정문수씨가 나왔고, 그를 포함해 서기관급 인사 5명이 배출되었다. 정민, 정병춘, 이동성, 정양섭씨 등이 그들이며 이들이 현재 정치, 행정분야 요직에서 고른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큰 자랑거리이다.

마을 청년의 안내로 마을 남쪽에 있었다는 활터와 서당터로 향했다. 물론 그 흔적은 없고 말 그대로 터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 전답이 돼버린 글배움터와 활터이건만 이 마을주민들은 아직껏 그곳을 심신도장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다. 장성, 묘량 운암동, 인근 고을 학동들까지 유학을 와 효경을 배우고 갔다는 서당터에 다다르자, 발길을 멈추고 불과 백여년전 이 터 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글을 외웠을 댕기머리 학동들을 떠올렸다. 글 공부보다는 먼저 사람되는 마음공부를 중히 여겼다는 그들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가는 보금자리, 효동마을.

초가지붕이 죄다 기와장, 슬라브로 둔갑하였어도 그들에게는 지금도 마을사랑과 충요전가(忠孝傳家)의 기풍이 숨어 있다. 숨어있는 것들, 잊혀진 것들이 새삼스레 건네는 손길이 따사롭다. 그것들이 바로 효동 사람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힘이 아닐까?

40여년동안 객지에 머물며 교육자로 살다 퇴직하고, 백발 성성한 모습으로 다시 고향을 찾은 이금재(65)씨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내가 고향 떠날 때에 비하믄 지금은 정말로 많이 변했제.. 그래도 변하고, 잊혀진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우리 마을 전통. 말하자믄 마을이름이 말해주는 뿌리 같은 것이지? 그런 것은 우리 피 속에 있는 거라 그냥 간직하고 사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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