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선 송이분교 교사

오후5시. 퇴근이다. 유난히 바쁜 하루를 마무리했으나 마음이 개운치 않다. 핸들을 꺾어 백수방면 해안도로에 들어섰다. 가파른 길을 한 숨에 올라 아래를 보니 드러난 개펄위로 법성포구가 정물화처럼 고요하다.

칠산바다 파시철이면 흥청이던 조기잡이 항구로서의 영화를 개펄에 묻고 이제는 전국적인 입맛을 꽉 잡고 있는 굴비의 고장이다. 차가 어둑한 은선암의 벼랑길을 만나 급한 구비를 한 두 차례 휘감았을까,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아! 발아래 들녘이 불타고 있었다.

해를 삼킨 구름 한 더미가 온 몸으로 뿌려대는 빛가루를 흠뻑 뒤집어쓰고서 가을 벼논은 호렙산의 가시덤불처럼 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비탈을 내리니 물길 따라 펼쳐진 호젓한 길가 작은 벚나무 이파리들이 수줍게 물들어 가고 있다. 외로운 길에는 가을도 일찍 깊어지나 보다.

이 물길을 와탄천이라 하며 백수와 법성을 나누었는데 이 곳에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길이 열렸다.

방조제가 가까워질 무렵 고개를 드니 들 너머 백수의 산들이 시야를 막는다.

그때 물길을 향해 비스듬히 내달린 여러층의 바위판들 위에 층층이 숲을 담은 거대한 산을 이끌고 있는 범상찮은 바위절벽이 한눈에 든다. 매 바위( )이다.

이곳은 와탄천의 물길이 오랜 세월을 굽이쳐 돌며 깎아 놓은 절경인데 지금은 그 밑을 메워 도로를 내었다. 이런 백수의 산들은 노령산맥이 서쪽으로 달리다가 바다 근처에서 마지막 힘을 쏟고 소멸한 곳으로 독립적인 높은 산군(山群)을 형성한다.

그래서 6.25전쟁 때에는 수복이 된 후에도 인접 도와 군들의 빨치산들이 모여들어 해를 넘기며 까지 항쟁하였을 정도로 험준한 곳이다.

제법 당당한 몇 개의 갑문 옆을 지나니 백수 땅이다.

삿갓처럼 솟은 옥녀봉의 뒷모습이 보인다. 길을 여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 길은 영산성지로 가는 길이다.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이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생가를 중심으로 단장되어 있다.

차는 오른쪽을 크게 돌아 순탄하게 내려가다가 처마처럼 삐죽히 내민 매 바위 밑을 지나 한 구비 오르내리니 수려한 산세 사이에 평범한 저수지 둑이 보이더니 금새 쌍둥이 저수지가 된다. 한선리 계곡이다. 이 곳의 물은 하도 맑아 식수로 사용하는데 법성포와 홍농읍까지도 먹여 살리는 풍부함을 자랑한다.

한선마을 뒤 고개를 넘으니 법성포의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법성포를 흘끔거리며 달리노라니 발아래 가파른 어촌이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물이 드는가보다.

어둑해지는 개펄 위 고깃배들을 벌써 깊은 잠에 빠졌는데도 물을 포구 쪽으로 흰 천을 펼친 듯이 아득하다.

모래미가 보인다. 해수욕장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봄철 이 일대의 모래밭에서 조개가 많이 잡혀 광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으로 최근에는 찻집, 식당들이 들어서며 제법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다.

눈을 드니 쥐섬과 고양이섬 사이에 바다가 보인다.

그 때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고깃배의 실루엣이 눈에 가득 차오며 가슴에 아슴한 파문을 일자 낙조를 보려는 조급함에 발에 힘을 주었다.

언제 오르막이었나 싶었는데 급한 내리막이더니 어촌의 정취를 두루 갖춘 마을이 나타난다.

대신리이다. 바다와 연결된 물 위 다리를 건너니 마을 앞에는 아담한 정자가 서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마을 끝에 이르러 측백나무로 잘 정돈된 학교가 있었으나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어야할 운동장에는 그물들이 널려 있어 오늘날 농촌학교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 마른 개울가에 펼쳐진 고추밭을 따라 오르니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며 하늘이 열린다. 마을 한 복판을 가로질러 언덕 위에 오르면 정유재란 당시 이곳에 침입한 왜놈들의 손을 피해 바다에 몸을 던진 아홉 열부의 순절지부터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먼바다 위 야트막한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낙조아래 크고 작은 섬들이 오늘 하루를 접고 있었다.

이곳의 명칭이기도한 칠산바다의 일곱 무인도 너머로 낙월도 각이도 송이도와 멀리 안마군도들이 흐릿하다. 문득 지난해 이맘때 이곳에서 건져 올린 '저녁놀'이란 글이 생각났다.

두고 가랬더니 날 두고 가랬더니 정녕 날 두고 어이 맘만 앗아가 그리움. 저리 타는고....

동해가 떠오르는 해와 넘실대는 푸른 물로 요약된다면, 서해는 지는 해와 넓게 드러난 개펄로 요약 될 것이요. 동해가 활동과 생산의 대면의 바다라면, 서해는 안식과 정화의 그리움의 바다가 아닐까?

고두섬이 보인다. 육지와 닿아있는 특징 없는 바위섬인데도 엄연한 이름을 갖고 이 부근의 지명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 곳 모퉁이를 돌 때 길 너머 바닷가에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가 바위섬에 갓 오르는 형상의 거북바위와 함께 각시바위, 서방바위를 볼 수 있다.

파도가 빚어낸 자연의 예술이라고나 할까! 그곳을 지금 지난 동백구미 마을의 길가에는 바람이 빚어낸 해송의 우람한 가지들이 이 길의 멋을 한층 더해준다.

이제 바다가 끝나려나보다. 멀리 넓은 간척지가 보이고 그 아래 개펄엔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 위로 간척지에서 새어나와 얼키설키 흐르는 가는 물줄기들이 찢겨진 그물처럼 마지먹 빛을 하얗게 붙잡고 있었다.

바다가 닫히는 지점에 해수 찜의 간판이 보인다.

이곳은 해수찜의 원조로써 아직도 해변의 바위 웅덩이에 천막을 치고 이곳에서 나는 유황성분이 많은 돌을 장작으로 구워 바닷물을 데우고 약쑥 등의 약초를 우려내어 목욕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이제부터의 길을 남북으로 뻗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빨리 어두워진다.

그런데 색깔을 분간하기 어려운 길가 코스모스 건너 밭이 온통 하얗다.

누가 그랬던가.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밭이라고. 봄철에는 이 곳 도랑을 따라 야생하는 유채꽃이 이 길의 삭막함을 없애주는데 이 두꽃은 자칫 메마르기 쉬운 이 땅의 두 계절에 생명을 칠하는 고마운 작물이 아닌가 싶다. 계곡을 벗어나자마자 큰 마을이 나타나니 백수 벌을 바탕으로 발달한 한밭들, 대전리이다.

초입의 고향집 같은 앞마당 감나무에는 아직도 해 기운이 주렁주렁 엉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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