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3.1 만세 운동

 문화기획 - 다채로운 역사 이야기

 


우리 영광이 지닌 문화유산이 많다. 그러한 문헌상의 역사자료나 유적유물, 인물 등에 관한 지식이 매우 정형화되어 있으며, 서술 위주의 정보제공에 그치고 있어 일반인의 문화유산에 대한 접근이 매우 진부하고 딱딱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본지는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며 세간에 회자될 수 있도록 우리지역의 시대적 주요사건 및 역사 유적유물과 관련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담화구조(스토리텔링)로 재편하여 게재코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축적되어 지역 역사콘텐츠의 확충과 보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일부 구체적 상황이나 주변 인물들의 행적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음.




 때는 1910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여 침탈하던 초기. 나이 스물셋에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맞는다. 아버지가 남긴 큰 재산을 물려받아 지역의 큰 부호가 된 박정환.


 


기골이 장대한 호남형의 생김새뿐 아니라 1910년대에 이미 면사직물공장을 세우면서 경영수완을 보인 그에게 1919년 3월의 일은 그의 생의 전환점은 물론 영광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다.


 


1919년 3월.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청년회를 이끌던 정인영과 직물공장에서 만난다. 직물공장은 녹사리로 넘어가는 길 우측, 우산 등성이(현 세종모텔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영씨! 조국을 빼앗아 침탈하는 일본놈들에 맞서 우리 같은 젊은이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마침 경성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다하네”


 


인영은 머뭇거리듯 말한다. “뜻은 알겠지만 태극문양만 봐도 눈 뒤집히는 일본놈들 모르게 어떻게 태극기를 만든단 말인가. 또 영광사람들을 어떻게 모이게 하지?”


 


 “태극기를 인쇄하고 애국가도 만들어야지~ 이곳에서 그것이 가능할 것도 같네. 일단 용기 있고 추진력도 있는 사람들을 이곳 직물공장에 불러 모아주게. 비밀리에 말일세”


 


조선 젊은이의 피를 타고 흐르는 나라사랑의 마음과 의협심이 만들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선대의 재산을 지켜야 할 부호인지라 일제치하에서 그 재산을 보존해야 할 정환에게는 도박과도 같은 행동이 아니던가. 그는 울컥 겁이 났다.


 


‘아버님, 전 어찌해야 합니까.... 박 씨 가문의 아들이기 전에 대한의 아들 아니던가요? 독립과 민중의 안위를 위해 택한 제 길을 부디 살펴주십시오’


 


돌아가는 인영을 바라보며 정환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인영은 위계후와 조철현, 서순채, 박병문, 노동회장 김은환, 유두엽, 박태엽, 이병영 등과 만나 다음날 직물공장에서 회합하기로 했다. 급기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만세운동에 대해 계획했다. 노동회장인 은환이 말문을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이 10일이니 닷새 후, 15일이 좋겠네. 천명이상 군민을 운집시키려면 청년조직과 노동회조직을 암암리에 움직여야 될 터.... 거사일까지는 모두 보안에 만전을 기해주게나.”


 


정환도 자신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인쇄하여 제공하기로 약조하고 거사일을 기약하며 동지들과 헤어졌다. 은환은 노동회 조직을 중심으로, 인영과 순채는 청년회 조직을 북돋우는 가운데 독립만세계획은 영광 군민들의 입소문을 타며 물밀듯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진 계획이라지만 주민들 사이의 입소문은 이미 순사들에게도 흘러들어갔다. 거사에 대한 첩보는 3월 15일 주민들이 어느 한 장소에 모여 만세삼창을 하고 자진 해산할 것이라는 정도였으리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만세운동을 총칼로 원천봉쇄할 경우, 돌아올 거센 반발과 항쟁을 염두해 두었을까? 경찰은 만세운동의 상황을 관망하며 주모자들만 색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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