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

  

작년 여름에 일본에 갈 일이 있어 후쿠오카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강항 선생의 유작은 돌아가신 아버지만큼이나 반가웠다. 장소는 후쿠오카의 박물관이었고 사진 촬영이 금지된 그곳에서 모처럼 체면을 접고 도둑 촬영을 했다. 아직 영광에는 공개된 적이 없었던 -중앙에서는 발표했는지는 모르지만- 난방(蘭芳)이란 조그만 편액이 바로 그것이다. 나중에 집에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카피된 편액이었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전혀 고풍을 잃지 않고 있었고 필세는 가히 선생의 이름을 빛내기에 충분 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일본 여행은 충분히 가치를 찾은 셈이었다. 전번에 이어서 수은 강항의 간양록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하자.


 이러할 즈음, 서울 대전 거리에서 살다가 임진년에 붙잡혀 온 사람이 왜경에서 도망해 이예주로 와서 매일 놀러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국으로 어떻게든 돌아갈 방도를 찾아 의논을 하고 5월 25일에 밤길을 타서 서쪽으로 빠져 나왔다. 밤길 팔십리를 급히 다투니 발은 부르터 피까지 흐른다. 낮에는 대나무 숲에 숨었다가 이튿날 밤에 다시 길을 떠나 판도현을 지나다가 문득 성문위에 글 한 장을 써 붙이니 “이놈들! 군사를 일으켜 선왕의 능을 파헤치고 노약자를 죽이고 자제들을 끌어가니 모든 것이 네놈들의 독기에 시달리지 않은 것이 없다. 석가모니도 내가 내려 보내 너희들의 스승이 되게 한 것이다. 석가의 듯을 너희에게 알리기 위해서이고 조선 백성들도 다 내가 어여삐 여기는 족속인데 모조리 살상하고 덤비니 너희의 뜻을 덮어주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성이 무너지고 금년에 물난리가 나서 보리 한 톨 남기지 않았는데도 깨우치지 못하니 이글로 한 번 더 깨우쳐 주는 것이다. 조선 백성을 향한 손을 거두지 않는다면 재앙을 퍼부을 것이니 후회가 없도록 하라.”라는 부처님 말씀을 빌어 놈들을 놀래주기 위한 글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적의 괴수 수길이가 6월 초부터 병석에 눕더니 가을이 되니 죽고 말았다.


 


 판도에서 서로 심리거리에 죽림이 있어 들어가 잠깐 쉬는데 예순 남짓한 중이 폭포에 몸을 씻고 밥을 지어 제사를 모시니 슬며시 우리 사장의 뜻을 전했다. 중이 쾌히 승낙하니 뒤를 따르기를 십여 보도 못가 왜적에게 되잡히고 말았다. 다시 판도성으로 끌려갔다가 결국 대진성으로 다시 압송되어 꿈쩍을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도 일이 없어 힘들었다. 하루는 심심해 승사(僧舍)에 갔더니 중이 시 한수를 지어 준다.


 


初逢賢聖夢耶眞 성인을 처음 만나니 꿈인가 아닌가


堪惜高人客裡身 외진곳을 떠도는 그대의 애석함이여


見月見花應有恨 달과 꽃을 보노라니 한만 더 하네


扶桑國盡戰爭塵 전쟁으로 다해가는 이 나라에서


 


그러다 6월이 되자 좌도(佐渡)가 철군하여 왜경으로 돌아와 부하를 보내 우리 가족을 서경 대판(大坂)으로  데려오라 했다. 모처럼의 뱃길은 감개가 무량이지만 여드레를 가야하는 지루한 뱃길이다. 풋잠에서 깨어나 문득 보니 구름 밖에 겹겹이 쌓인 십층 누각이 솟구쳐 보이니 정신이 다 아득해 온다. 이윽고 복견(伏見)에 닿으니 빈집 창고에 가족을 넣고 문지기로 시촌이란 늙은이를 세웠다. 이곳에서 여러 선비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고, 전라 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서쪽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 수길에게서 받은 비단이며 돈으로 배 한 척을 사서 탈출 하다가 적간관에서 쫒김을 당하자 칼을 빼어 물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하니 왜적들이 시체를 남은 사람들과 함께 환괘(轘掛)의 형에 처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수길이 죽자 그를 북문에 묻고 황금전을 짓고 왜승 남화(南化)가 호걸 운운의 글을 써 붙였길래 붓으로 문질러 버리고 이렇게 써 놓았다. “반평생 해놓은 일이 흙 한사발인데 십층의 금전(金殿)은 누구를 속이자는 건가. 탄환이 타인의 손에 쥐어지면 푸른 언덕 내닫는 것쯤이야!” 왜승이 내 조심성 없음을 탓했다.


 


 명의 차관이 사가이의 여관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문지기 놈에게 돈을 쥐어주니 선뜻 들여 보내주어 이들에게 울면서 청을 넣었다. 가강(家康)에게 말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같이 갔던 신계리가 경박하여 풍신수길을 욕하니 통역 놈이 행장의 형인 장우문에게 고자질했다. 결국 문밖으로 나오자 마자 밧줄에 묶여 방에 갇히고 저녁에 모두 환괘의 형에 처한다고 하니 명나라의 차관이 거듭 용서를 부탁하여 겨우 풀려나 돌아 왔다. 그 후 왜승 순수좌에게 글씨를 팔아 은전을 마련하여 배 한 척을 사서 막 떠나려는 무렵에 다시 신계리가 경박한 입을 놀려 누설하고 마니 좌도는 중형과 계리 일행을 묶어 대판으로 끌고가 중형을 제외하고 하루에 한 사람씩을 본보기로 죽였다.


 


 경자년 2월에 적장 좌도가 수왜(守倭)에게 가족의 단속을 느슨히 하도록 이르니 수왜가 나가 버라고, 이에 순수좌(舜首座)를 찾아가 귀국할 방도를 부탁하게 된다. 4월 초에 왜경을 떠나 배에 오르니 감회가 크다. 배가 일기도이 닿자 폭풍우가 열흘이나 계속 되었고 결국 뒷산에 올라 천신께 제사를 드렸다. 왜왕의 시녀였던 청송소납언이 궁내 비밀 누설로 일기도에 귀양을 살고 있어 양식을 청하니 양식과 두 종까지 보내 주었다. 이 노비가 울면서 시 한 수를 청한다고 하기에 한 구절을 지어주니


 


當時相見洛陽城 낙양성에서 서로 만날 그때에는


王母前頭作伴行 왕모를 앞에 모시고 같이 걸었거늘


今日相蓬蓬海外 쑥대 바다 건너서 만난 오늘은


碧桃花瘐露盈盈 시든 복숭아꽃 여윈 자국에 눈물만 넘치는구나.


 


 귀국하려는 포로들에게, 적송(赤松)의 순수좌가 물길 안내를 위해 보내준 자를 통해 대마도는 괜찮다는 것을 알렸다.


 


본래 이 책의 이름을 건차록(巾車錄)이라고 강항 선생이 손수 붙였다. 건차란 죄인이 타는 수레이니 나라에 죄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이라고 스스로 낮춘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선생의 글을 통해서 들여다 본 문장과 시는 선생을 낮추기에는 어림없으니 이런 책명은 가당치 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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