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살기 좋은 나라는 없다.

그 중에서도 가을이 마음에 와 닿는다. 옛날 선조들께서 이 가을 마음껏 즐기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가을을 예찬했으니 "천고마비의 계절", "결실의 계절", "풍요의 계절", "독서의 계절" 등등 칭찬하기에 붓끝이 모자라고 짧은 혀로는 말하기에는 부족했던 계절인 것 같다. "천고마비의 계절" 이는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가을이 썩 좋은 절기임을 일컫는 말이다. 가을하늘을 쳐다보아라! 높이 파란 종이 한 장을 펼쳐 매달아 놓은 것 같지 않은가! 이 파란 종이가 저수지, 강에, 바다에 내려와 앉으면 그 파란 물에 하얀 손수건을 적셔 보아라!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깨끗한 마음이 되어 온 세상이 파랗고 순수한 마음으로 변해가지 않는가?

황금 물결치는 들판, 보릿고개의 한숨이 주름진 농부의 입가에 웃음으로 바뀌고, 햇곡식으로 정성껏 밥지어 조상님께 바치고, 이웃과 나누어 먹던 정겨운 계절, 가을! 따뜻한 인정이 오가는 계절이다.

요산요수(樂山樂水 -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뜻)하는 사람들은 햇곡식에 배불리 먹고 산에 오를라 치면 풍요로운 계절임을 실감한다. 고개를 들고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거기엔 익어 가는 붉은 감들, 아니 가시옷을 터트리고 고개를 내미는 밤알들이 나를 부른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맹감, 머루, 다래들이 나를 기다리면서 익어가고 있다. 고개를 아래로 발부리를 보면 도라지, 더덕, 버섯들이 내 발을 멈추게 하니 누가 이더러 풍요의 계절, 결실의 계절이라 하지 않겠는가? 원시인이 아니라도 이 산 속에서 몇날 며칠이고 쉬어 가고 싶다. 과일은 있으니 배는 부르고, 산골 물은 오염이 안되었으니 마음놓고 마실 수 있으며 빨강 노랑 단풍들은 방석 삼고 이불 삼아 팔벼개하고 누웠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있겠는가?

가을은 말만 살찌고 배만 부른 계절이 아니다. 우리 사람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귀뚜라미 창가에 울고, 천공에 매달린 밝은 달이 책을 들게 하고 풀잎을 스쳐온 맑은 바람이 글을 읽게 한다. 책속에는 선열들이 얼과 지혜가 숨쉬고 효도하는 마음, 형제간의 우애, 이웃간의 사랑, 나라에 충성하는 인간의 도리가 꿈틀거린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책이 몇 권인가? 내가 읽은 책은 이웃이나 후배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없는가? 다시 한번 생각 해 보고 책을 들자.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고등 교육을 받은 곳, 내 고향은 영광이다. 불갑산이 있고 칠산바다가 있으며, 영광 굴비가 있는 내 고향! 그 중에서도 태청산 아래 남산 저수지를 품에 안고 풍요롭게 아름다운 꿈을 꾸던 산골마을 남산이 내 고향이다. 이 고향 마을에 가을이면 꼭 열리는 씨름판이 있다. 저수지 뚝 넓은 곳에 모래판을 만들고 어린이부, 청소년부, 장년부로 나누어 힘을 겨룬다. 마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기는 대행사이다. 마을 이장님이 자금을 만들어 상품도 푸짐하다. 물론 나도 한몫 끼어 즐겼었다. 전문적인 씨름꾼은 없다. 그러나 넘어지고 자빠지고 뒹굴다보면 해가 지고 밝은 둥근달 아래서 상 씨름판이 붙는다. 그때는 개인의 응원이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응원으로 열기가 뜨겁다. 이긴 마을이건 진 마을이건 아쉬움을 안고 돌아간다. 그래도 가을 씨름판은 즐겁다.

가을!

가을하면 또 하나의 즐거운 행사가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마이크 소리가 학교 운동장에 울려 퍼지면 초등학생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가 즐겁다.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햇곡식으로 햇과일들로 만든 음식들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내 아이가 일등을 해도 좋고, 꼴찌를 해도 좋다. 여름에 농사 짓던 괴로운 일들이 일순간에 사라진다. 그 동안에 못 뵈던 친척어르신도 뵙고 아들 딸들과 운동장에서 달리기하다 넘어져 뒹굴어도 마냥 즐겁다. 이것이 가을 운동회다.

우리 사람에게도 사계절이 있다. 어린 시절은 봄이고, 청소년 시절은 여름이며, 장년 시절은 가을이고, 노년시절은 겨울이다. 어린 시절은 봄과 같이 새싹이 돋아 새로운 삶을 꿈꾸며 희망에 부푼다. 어린 싹이니 어른들의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시기다.

청소년 시절은 여름이다. 여름에는 곡식은 심고 가꾸며 피땀 흘리고 가을을 꿈꾼다. 그러니 지금 청소년기는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미래를 설계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기다. 이 때가 가장 중요하다. 장년 시절은 가을이다. 가을에 열매를 맺듯 청소년기에 꾸었던 꿈을 이루는 때다. 열매를 튼튼히 맺어야 한다. 노년기는 겨울로 본다. 겨울에는 가을에 맺은 열매를 수확하여 창고에 쌓고 눈오는 날에 꺼내어 먹는다. 우리 모두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장년 시절을 멋있고 보람있게 보내 노년기를 뜻있게 보낼 수 있도록 열심히 살자. 늙어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칠십이 되어 가며 과거를 되씹어 보고 아쉬워해도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봄에 새싹이 돋고 여름에 뜨거운 햇볕과 적당한 물을 흡수하며 튼튼하게 자라야 가을에 풍성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듯이 피땀 흘리며 노력할 시기에 최선을 다해야 늙어서 후회하는 삶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결실의 계절, 풍요의 계절을 꿈꾸며 독서하기 좋은 계절에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맑은 마음으로 책을 펴자. 그리고 가을의 고향을 기억해 보자.

이건주(재경 영광군 향우회 자문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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