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 다채로운 역사 이야기 3

 우리 영광이 지닌 문화유산이 많다. 그러한 문헌상의 역사자료나 유적유물, 인물 등에 관한 지식이 매우 정형화되어 있으며, 정보제공에 그치고 있어 일반인의 역사 문화유산에 대한 접근이 매우 진부하고 딱딱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본지는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며 세간에 회자될 수 있도록 우리지역의 시대적 주요사건 및 역사 유적유물과 관련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재편하여 게재코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축적되어 지역 역사콘텐츠의 확충과 보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해발 257m 영광읍 물무산. 이 산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 당시 영광의  급박했던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다.「야든이의 죽음」. 야든이는 그의 아버지가 여든 나이에 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물론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성씨가 楊(양)씨인 것으로 전해질 뿐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8․15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여기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군수 이름은 몰라도 야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세간의 명물이었다. 힘이 세서 품을 팔았고 장터에서 짐을 나르며 초상집이나 잔칫집에서 심부름한 대가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바보」로 불릴 정도로 일 할 때는 요령을 피우는 일이 없었던 야든이. 그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그러나 공짜밥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물러간 후에도 영광군에는 빨치산이 산악을 중심으로 잔존해 있었다. 잔존해 있는 빨치산으로 인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천하가 되는 상황.물무산도 마찬가지로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영광읍내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문제는 산 정상에 있는 국기 게양대! 낮에 태극기를 걸어 놓으면 빨치산들이 밤 사이에 인공기로 바꿔 놓았다. 빨치산이 숨어 있는 산 정상까지 가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중요하지 않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 이데올로기 대립은 결국 「밥」이 절실했던 야든이에게 죽음을 선물한다.





돈을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야든이에게 아침마다 물무산 정상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이 맡겨졌다. 야든이는 태극기를 안고 산에 올랐다가 인공기를 들고 내려오는 일을 아침마다 반복했다.


 


야든이에게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든이는 물무산 빨치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다. 남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단지 생존을 위한 「밥」이 절실했던 야든이에게 죽음을 선물한 것이다.


 


6.25라는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야든이의 일생은 비극이다. 야든이의 죽음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9.28 수복보다 한참 뒤늦게 찾아온 수복으로 인해 전쟁의 참화가 더욱 심각했던 이곳의 상황이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 우리겨레 최대의 난제를 한 몸에 떠안은 야든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 그를 키워 준 고향 영광을 위해 해야 할 일,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누군가를 대신하여 감당해야만 했다.


 


선량하고 유쾌했던 그의 일생은 이렇듯 가장 비극적이었던 이데올로기전쟁의 제단에 바쳐지며 고향산 골짜기 무명전사의 주검처럼 소리 없이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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