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화화

-여민동락공동체 설립 1년을 돌아보며-

강위원/ 여민동락공동체 원장



  묘량면에서 여민동락 공동체가 출발한지 꼬박 1년입니다. 맨 처음 그 자리를 생각하니 정녕 과분한 사랑이었습니다. 먼저 손길 내밀어 나눔과 사랑을 씨뿌려 주신 마음 앞에, 저희가 진실로 떳떳한지 나직이 마음을 살피게 됩니다.

 


어쩌면 무모했는지도 모릅니다. 낯선 일 낯선 도전 앞에 생을 걸고 뛰어든 저희들의 농촌행을 두고, 믿음보다는 우려가 대세였습니다. 일 년여 시간, 참 공부 많이 해야 했습니다. 제 아무리 꼼꼼한 설계와 준비를 했다 해도, 새로운 삶터를 일구는 일은 여러 벗들의 우려대로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세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는 일만으로도 태산을 옮기는 일만큼 버거웠음을 고백합니다. 도시문명에 갇혀 있던 껍질을 깨고 새살을 돋우는 일은 갈등과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농촌살이의 고유한 문화와 규칙을 각성하는 과정도 차라리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랏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지갑부터 열어 먼저 나누자는 원칙, 스스로 농민이 되어 밭 한 평이라도 노동하고 경작하자는 소신, 복지 안에 갇힌 복지가 아니라 지역민의 일원이 되어 지역일체형 생활공동체를 만들자는 철학을 이뤄가는 일 모두, 솔직히 말하자면 고행이자 수행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공동체를 가르치고 키워준 은인은 지역주민이었습니다.


 쌀 한가마, 마늘 한 접, 콩 한 되, 고구마, 호박, 감자, 오이, 채소....끝이 없이 이어졌습니다.


 


 빵가게, 굴비집, 식품가게, 떡집, 밥집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 걱정보다도 주민들의 참여와 나눔의 신비에 행복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역의 신비는 광주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이어졌습니다. 고향을 아껴줘서 고맙다며 적지 않은 돈을 보내온 출향민부터, 인터넷카페를 보고 중고물품을 택배로 보낸 주부, 수십 년 공직생활 중 포상을 받아 익명으로 상금을 기부한 공무원까지.....실로 예상치 못한 사랑이었습니다. 여민동락 곳간을 채워주시는 전국 후원자들의 감동적인 나눔의 행렬 앞에, 그때마다 저희는 매순간 숙연해져야 했습니다. 사랑받은 만큼 반드시 몇 배 더 사랑하고 나누는 헌신적 실천이야말로, 받은 사랑 배신하지 않는 일이라 다짐하곤 했습니다.


 


 저마다 “보조금 없이 어찌 운영하느냐”고 의아해 하기도 했습니다. “나랏돈 누가 써도 쓰는 건데, 왜 그렇게 순진하냐”고 타박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일리 있는 조언이지만, 아마 처음부터 보조금으로 시작한 여민동락이었다면, 이런 신비는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겁니다.


 


국고나 기업후원은 원칙적으로 확대돼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의 책임이고 기업의 사명이 돼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고나 기업후원은 근본적으로 '지원'일 뿐이지 창조적 '생산'은 아닙니다. 자립은 외부지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부경작과 생산, 개미후원과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서 가능할 때 진정한 자립이며, 그러한 경제적 자립이 실천의 독립까지 보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민동락은 첫마음 그대로, 소박하고 우직하게 지역복지를 일궈가겠습니다.


 여민동락을 제 한 몸에 가두지 않고 지역에 전면적으로 바치며, 농촌을 살리는 맨 끝자리에서 분투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복지를 통해 내 자신이 아름다워지고 살맛나는 지역이 되고 나아가 세상이 바뀔 수 있는 복지의 본령에 충실하겠습니다. 여민동락 공동체는 이제 걸음마를 뗐습니다. 앞으로 홀로서기의 그 성숙과 완성은, 동행하는 벗들의 힘으로만 오롯이 가능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존재 깊숙한 사랑과 믿음을 온몸으로 확인받으며 사는 여민동락은, 멋진 세상을 만드는 먼 길 내내 행복할 것입니다. 모든 이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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