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품는 숨소리가 휘파람소리 같다하여 유래된 휘파람 골“

③ 괸돌과 대삿고개 그리고 휘파람 골

 ‘남선전기변전소’에서 소위 신작로라 불렀던 옛길을 따라 법성포↔영광 간, 4차선과 합류되는 국도를 지나면, 다시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신작로가 나온다. 그리고 곧 ‘괸돌’ 마을에 이른다.

 

△기둥형 굄돌형 고인돌▲ 이 고인돌이 전남지역에서 맨 처음 발굴된 기둥 형 굄돌이 있는 고인돌이다. 원래 복룡동 입구, 삼거리 길에 있었는데 도로로 편입되어 이곳으로 옮겼다.
이 마을 역시 조선시대에는 갯가였고, 70~80년 전만해도 사람이 살지 않았었는데, 차도가 생기면서 도로 양쪽으로 민가가 하나, 둘 들어서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복룡동’ 앞, 들에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이 있는 들”이라는 데서 유래되어 “괸들”이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인데, 행정지명은 ‘괸돌’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제까지 전남지역에서 발굴된 고인돌 중에서 기둥 형 굄돌형태의 고인돌로는 이 마을의 고인돌이 맨 처음이었다고 한다.

 ‘‘괸돌’마을에서 영광 쪽으로 150여 m정도 더 가면, ’신덕동’ 사람들이 외지를 오가려면, 꼭 넘어야 했던 ‘대삿고개(竹林峴)’에 이른다.

 이곳 또한 ‘둑바우’ ‘해수둠벙’과 마찬가지로 6.25때 민초들의 아픔이 이곳 우측 ’대덕산‘ 아래 공동묘지에 말없이 남아있고, 고려시대 세미를 노적했던 곳으로 전래되는 지역이다.

 ‘대삿고개’를 넘어 ‘신덕동’으로 들어서, ‘신덕저수지’쪽으로 가다보면 ‘고법성(古法聖)’으로 가는 길과 ‘창령성씨’ 문중의 ‘부흥제(復興齊)’로 가는 길이 나온다.

 한때 27가구가 옹기종기 살았었다는 ‘고법성’의 옛 지명이 ‘복흥동(福興洞)’이라 하였다고 ‘법성향지’는 전하는데, 왜 ‘고법성’을 ‘복흥동’이라 하였는지 그 연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옛날(古) 법성이었다는 지명의 뜻에서, 또,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에 걸쳐 매향했음을 음각하여 새겨 놓은, 이 마을과 가까이 있는 곳에 세워져 있는 ‘매향비’에서 이곳이 고려시대 우리고장의 치소(治所)였음을 가늠케 하는 마을이다.

 ‘부용창지’는 ‘부흥제’로 가는 골짜기를 따라가야 한다.

△ 망운제의 옛 모습▲ 휘파람 골 초입에 있는 ‘창령성씨’ 문중의 제각이다. 지금은 부흥제(復興齊)로 개명하여 현대식 슬래브 단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영광군’에서 발간한 ‘영광군문화유적분포지도’(2004)에는 이 제각이 누락되어 있는데 앞으로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부흥제(復興齊)’는 ‘여지승람 영광편 제각조’에 “在法聖面大德山下新德洞 贈參判 昌寧成匡修墓在焉其子夏忠朝夕望墓號其齋曰望雲(법성면 대덕산 아래 신덕동에 참판을 지낸 창령 성씨 광수의 묘제를 위한 제각이 있다. 그의 아들 하충이 아침저녁으로 망묘하여 후일 제각의 이름을 망운제라 하였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망운제(望雲齊)’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서지가 편찬된 시기(고종8년, 1871년)는 ‘법성면’이라는 행정지명을 쓰지 않았는데 왜 “법성면에 ...있다....(在法聖面..)”라고 하였을까?

 이는 조선 고종 때 편찬된 ‘여지승람’을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다시 간행(李鍾宅序)하면서고종 때 편찬된 ‘여지승람’을 인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흥제’을 지나 ‘가압장’ 쪽으로 가다보면, 나무와 풀만 없으면 제법 운치 있을 법한 골짜기로 들어선다. 이 계곡 길이 ‘고려사’에 등장하는 우리고장의 ‘부용창’ 터로 가는 길이며, 고려시대 민초들이 세곡(稅穀)을 지게에 지고 이 골짜기를 따라 ‘세운골’ 잔등‘으로 오르면서 힘들어하며 내품는 숨소리가 휘파람소리 같다하여 골짜기 이름을 ’휘파람 골‘이라 하였다 는 곳이다.

 

④부용창지(상)
“왜 이리 높은 곳에 창 터가 자리했을까?”

‘휘파람 골’을 따라 대덕산 쪽으로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하나는 ‘은선암’으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평부등’으로 오르는 길이다. ‘부용창지’는 ‘평부등’쪽으로 가야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우리고장에 부용창이 건치된 것은 고려 성종 때(982~997) 혹은 정종 때 (1035~1046)의 일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조창성립과정을 살펴보면 성종 대 이전에 전국에 60포(浦)를 두었고 이 포(浦)를 거점으로 거둬들인 조세를 지방호족들의 협조아래 뱃길을 따라 개경으로 운송하였다. 그리고 그 60포 중의 하나가 우리고장의 ‘아무포(阿無浦)’였다.

▲ 부용창지 고려시대 부용창지는 수 년 전, 박래학 면장 재임 때, 대덕산 등산로를 정성들여 정비하면서 설치한 아치형, 철제 장미 터널 근처에 있다.
이렇듯 우리고장의 조창기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종 11년(992)보다 훨씬 앞선다. 즉, 성종 11년(992)에 개경까지 조운거리에 따라 운송료가 결정되고, 우리고장의 예에서와 같이 ‘아무포(阿無浦)’를 ‘부용포(芙蓉浦)’로 포구의 이름을 새로 제정하는 등,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여 비로소 ‘부용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이를 기점으로 오늘 날 ‘조창천년’운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고장의 조창은 백제시대 성터로 비정(比定)하고 있는 ‘용성리 성촌’의 옛 지명이 ‘창촌(倉村)’이었고, ‘창전(倉田)’이라는 또 다른 지명과, 성터 안에 천영제(薦靈祭)를 지내는 제단, 그리고 이곳과 가까운 ‘통곶댕이(通串)’까지 배가 접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 기원이 이제까지 밝혀진 과는 달리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부용창지’는 대덕산의 6~7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큰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평평한(平) 넓은 구릉(丘)지대라 ‘평구등(平丘嶝)’이라는 표기가 맞을 법한데 ‘영광군지’ 등에는 ‘평부등’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왜 넓은 아래 땅을 놔두고 이리 높은 곳에 창 터가 있느냐고? 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고려후기에 들어서 일본 변경의 영세어민들은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를 근거지로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우리고장에도 충정왕 2년(1350) 4월에 이들이 침입하여 조운선을 약탈해 갔고, 같은 해에 이들의 내습으로 임치현 사람들이 백수의 요골일대에 토성을 축성하였으며, 공민왕 3년(1354)에는 우리고장의 조운선을 포함하여 40여척의 조운선이 이들에게 탈취 당했고, 이듬해에는 무려 200여척의 조운선이 이들에게 약탈당했다.

 

▲ 입암리 매향비미나리꽝에 묻혀있던 이 돌이 지금은 전라남도문화재로 2004년 9월 20일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또한, 공민왕 7년(1358)에는 왜구들이 부안의 안흥창 바로 옆 검모포(黔毛浦)에 침입하여 조운선에 불을 지르고 임피의 진성창(鎭城倉)까지 침범해 왔고, 2년 후인 공민왕 9년(1360)에는 강화도에 쳐 들어와 미곡 4만 여석을 약탈해 갔다. 또 공민왕 12년(1363)에는 213척에 이르는 대규모 선단의 왜구(倭寇)가 강화도 교동에 정박하였고, 우왕 2년(1376)에는 이 들의 난을 피해 교동현 백성들에게 피난조치까지 하였다.

 이렇듯 당시의 시대상황은 왜구들이 들끓었고, 특히 세곡을 보관하고 있는 창 터는 이들의 주요 공격목표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의 침략에 대응하여 조창 등을 산의 6~7부 능선으로 옮긴다.

 몇 해 전 충주의 ‘가흥창’을 발굴한 최일성 교수도 ‘가흥창’의 위치 또한 이곳 ‘부용창’과 유사하다면서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편, 민초들은 이와 같은 시대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매향비(埋香碑)’를 세웠고, 그 당시 세웠던 ‘매향비’가 ‘입암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매향(埋香)이란 민중들의 순수한 기복 신앙의 일종으로, 마을의 보(寶)·결계(結契) 또는 향도(香徒)들이 주도하여 향(香)을 땅에 묻고 현실적인 위기감을 구원받고자 했다. 그리고 매향사실을 돌에 새겨 ‘매향비’를 세웠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매향비중 고려와조선, 두 왕조에 걸쳐 매향했다는 사실을 돌 하나에, 앞뒤로 새겨 놓은 ‘매향비’는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로 등록(2004.09.20)되어 있는 이곳 ‘입암리’의 ‘매향비’ 뿐이다.

 이 비의 앞면에는 “홍무(洪武) 4년(고려 공민왕 20년)(1371) 4월에 남쪽으로 200보(步)지점에 매향(埋香)을 하였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서천(西天)(동방정토가 있다는 방향)을 우러르며 소원을 비나이다.-(1行) 洪武四年辛亥四月 日 碑 (2行) 向南二百步埋香 (3行) ▨ ▨化重天▨向西達連元 ▨ ▨徒 ▨ ▨ ▨”-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영락(永樂) 8년(조선 태종 10)(1410) 8월에 남쪽으로 200보 떨어진 곳에 매향(埋香)을 하였습니다. 향도의 총수는 한공이며 모(某)량의 시주미로서 1일 사시(巳時)에 행하였습니다. 4척(尺)之寸의 향목(香木)을 시주한 사람은 김한어입니다. (1행) 永樂八年庚寅八月日向南二百步埋香碑 (2행) ▨願香徒棟梁韓公守全向 (3행) 結▨施主米二加勿1日巳時土右 (4행) 四尺之寸▨▨▨金生漢於郞-”라고 새겨져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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