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이 / 영광신문 사외 논설위원

  요즈음 영광읍 남천리 우산공원 서쪽 기슭에서는 국내 유수의 학술연구소 유적조사단이 영광군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대규모 유적발굴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문화예술회관을 짓기 위한 터 닦기 공사 과정에서 예사롭지 않은 옛 건축물들의 유구(遺構)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조사,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무엇이 어떻다’는 결론을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이 유적은 조선조 이전 고려조의 영광고성(靈光古城)과 관련이 있는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발굴되고 있는 유구의 규모로 볼 때 사사로운 건물 터라고 보기 보다는 관아(官衙)터일 가능성이 높고, 위치(지점)로 보아서도 조선조 이전의 영광고성 관련 기록과 부합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이전 고려조부터 우산(牛山)에 읍성(邑城)이 있었다는 기록은 몇몇 문헌에 나타나 있다. 1454년에 발간 된 세종실록지리에는 「읍성은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547보」라는 기록이 있고, 1530년에 발간 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숙주(申叔舟:1417년~1475년)의 영광 객관(客館) 순례기가 전재(轉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452년(문종2,壬申)부터 1456년(세조2,丙子)까지 5년에 걸쳐 우와산(牛臥山)에 있던 고성(古城)을 지금의 객관이 있는 곳 (현 영광읍 무령리 일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성을 옮긴 사유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지리가 불순한 점, 성보(城堡)가 낮고 축성 후 보수를 등한히 하여 무너진 곳이 많은 점, 공청이 비좁은 점 등을 열거하고 있다. 철종 때 외간면(外間面:현 군남면) 출신 김정(金鉦:1793~1867)이라는 선비가 쓴 골동설(汨董說)이라는 고문건(古文件)에는 「본군은 옛날 우산의 호정등(虎井嶝)에 있었으니 지금도 그 자취가 완연하다. 그 때의 고을 이름은 무시이(武尸伊:백제 시대의 영광 지명)였는데…」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우산이나 우와산은 역대 지리지(地理誌)에 기록된 방위나 읍성과의 거리로 보아 같은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만(牛巒)이나 고성제(古城峙)로도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발굴 된 유적이 옛 건축물의 유구로 판명된다면 당시의 건물 규모와 형태는 물론 건물 배치 구조까지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작은 돌무더기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인 형태로 묻혀 있을 뿐, 건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추춧돌 크기의 돌이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건축물 유구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주춧돌이 일시에 어디론가 옮겨져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이야기 하며, 혹 1452년~1456년(신숙주의 기록에 나타난 이성/移城시기) 당시에 모두 새로운 성으로 옮겨 쓰였을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 추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인 바, 이번 조사, 연구에 직접 참여한 역사연구자들의 수준 높고 사려 깊은 최종 결론을 기다려본다.

  역사기록은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역사 읽기는 진실의 해석이어야 한다. 편향된 시각이나 가치관 또는 특별한 인연에 얽매여 왜곡 기록하거나 왜곡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역사 기록정신과 해석정신은 우리의 왕조실록 예에서도 엄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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