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프리랜서

“민주주의로 포장된 ‘공화국’으로 변했다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사기죄인 아버지를 둔 딸들로 만들지 않겠다는 친구의 사건에 수백명 동창들은 ‘무소불위 사법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죄인으로 만들지 않기위해 고민하는 법관을 양성하는 것이 공정사회로 가는 첩경이다”

“옛 어른들의 장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각별 했다. 귀한 것, 좋은 것은 우선 장손에게 먹이고 입혔다. 부모나 사회는 이같은 장손에 대한 유별난 사랑을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불공정이 상식화 되고 정당성 까지 갖춘 사회 였다. 장손 아닌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부모들의 편애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장손과 다투다가 들킬 경우에도 꾸중과 매타작은 언제나 장손을 비켜간다.

가정의 불공정은 사회로 까지 확장 됐다. 양반과 상놈, 벼슬과 재산의 차이가 정의와 불의, 잘잘못을 갈랐다. ‘고리타분 하다’고 하던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공화국’이 된 뒤부터는 공평이 상식이며 정당성을 갖는 나라로. 최소한 겉으로, 법으로는 ‘민주주의’로 포장된 공정한 나라로. 속은 어떤가. 돈과 권력이 상식과 정당성을 재단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편리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법마저도 그들만을 위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공화국’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못 가진자들에게는.

짜장면 한그릇 얻어 먹으면 짬뽕 한그릇으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가 있다. 돈도 빽도 없었지만 근면성실로 사업을 일으켜 남부럽잖게 만족하며 살았다. 백억대의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그의 사무실은 꾀죄죄 했다. 중형 승용차를 보고도 차가 좋다며 감탄 했다. 자기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던 친구에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사기죄로 1년여의 옥살이를 한 것이다.

경찰이 수십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며 수사를 시작하자 억울함이 분노로 변해 큰소리로 항변 했다. ‘죄’를 알고 잘 다루는 사람 같으면 변호사를 선임하고 ‘청탁’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세상을 ‘요령’으로 살지 않고 정직하게만 살아온 그는 죄를 만들어가는 경찰과 검찰에 맞섰다. 그의 주장과 증거는 묵살됐다. 부당하게 돈을 빼먹고 “사장이 지시했다”고 부하직원과 하청업체의 주장만 받아들여 졌다. ‘사기’죄인이 된 친구는 1년여의 옥살이를 마치고 나와 억울함을 밝히기에 나섰다.

“사기죄인 아버지를 둔 딸들을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 했다. “잊어버리라”는 충고 뿐이었다. 5년여 동안 법과의 외로운 싸움을 해온 그는 결국 고교 동창회 홈페이지를 통해 친구들에게 호소 했다. 현직 변호사를 포함한 친구들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그의 “무소불위 검사와 재판부의 오판” 주장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행 법체계로는 재심을 받아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없을지라도 명문고 출신 수백명의 친구들의 판결을 받은 것이다. “친구의 딸들은 사기죄인 아버지를 두지 않았다”는 판결 말이다.

대통령도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도 “공정”을 입에 달고 산다. 공정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법권이 권력에 의해 춤을 춘다는 의심을 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검찰은 야당에 몸담고 있는 한명숙 전총리는 재판대에서 1년여동안 몸고생 마음 고생을 했다.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잠정적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도청 혐의로 고소당한 여당 의원에게는 검찰이 소환 한번 하지 않고 몇달만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때마침 39년만에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던 정원섭 목사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법의 집행이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감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법관을 뽑을 때 법에 대한 지식 보다는 법의 정신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집행할 의지가 있는가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죄인을 만드는 법관이 아니라 죄인으로 만들지 않기위해 고민하는 법관을 양성해야 한다. 개인과 국가의 안정과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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