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공옥진 여사가 춤에 담긴 한을 남긴 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명인 공옥진 여사는 삶의 희로애락을 자신만의 해학적인 춤사위와 한 맺힌 소리로 풀어냈다.

80년대 들어 전국 각지에서 그의 공연요청이 쇄도 했다. 국내 유명공연은 물론 한국 예술인중 몇 명 안 되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져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문화적 가치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화계에서 이방인이었다.

문제는 1인 창무극'의 대가 공옥진 여사가 전수자를 제대로 남기지 못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공 여사의 지방 무형문화재 지정이 10년 이상 지연되면서 결과적으로 전수자를 육성할 시간과 건강상의 여유가 없었다.

영광군이 조그마한 전수관을 만들어주어 사비를 들여 제자를 육성했으나 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생활고에 시달렸고 제자들 역시 하나 둘 떠나버렸다.

영광군은 지난 99년 공옥진여사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으나 전남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결과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부결됐다.

이에 끟임없이 타당성을 요구한 결과 전남도는 2010년에야 판소리 일인창무극 심청가를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했다.

노구에 병마와 싸우면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공여사에게는 한줄기 빛이었다. 공여사는 그간의 한을 풀게 되었다며 눈시울을 붉히면서 건강을 되찾아 후학양성은 물론 무대에도 꼭 다시 서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투병 생활 때문에 별다른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전수자도 길러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그러나 그의 예술은 영광에 남아있다. 이제 우리들은 그를 기리는 일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다행이 군이 나서 공 여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광읍 교촌리 예술연구소를 기념관으로 만들겠다는 의미 있는 소식에 감사하다.

우리는 버림받고 외면 받으면서도 꿓꿓하게 살아온 공여사의 예술의 혼을 그곳에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의 문화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문화 창달을 향한 초석을 만드는 일이다.

그의 예술가적 정열을 후세에 남기는 영광을,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은 예술인 예인 공옥진의 춤과 노랫소리가 남아있는 고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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