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천/ 자유기고가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온 나라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젊은이들은 전장에서 죽어갔고 후방에선 좌.우익으로 갈라져 반목하며 서로를 죽였다. 이 가운데는 집안끼리 나뉘어 서로를 처형했고 심지어는 형과 동생이 아군과 적군이 되어 총을 쏘아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6.25 전쟁 수복일은 928일이다. 그러나 이곳 영광은 한 달 이상 늦어진 1030일 경이 수복일이었다. 수복을 기다리던 그 시기, 우리 고장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 돼버렸다. 사망자 수만 하더라도 군민 13만 중 3만여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말이다. 백수는 일가족 33명이 몰살당하기도 했고 염산에서는 교회의 신도들이 거의 대부분 처형당하며 순교했다. 이뿐이랴? 전쟁통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모든 것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영원히 아물 것 같지 않은 상처였을 것이다.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된 민간인만해도 70만명에 달했던 이 전쟁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가슴 저미는 사연을 어디 질량으로 다 헤아리겠냐만은 이곳 영광 땅에 바보처럼 살던 어느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이 전쟁의 비극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영광의 터줏대감이라 할만한 7080대 이상 노인들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잔존하고 있는 한 인간의 이야기! ‘야든이이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목숨을 잃었던 물무산 기슭에는 그를 추모하는 키 작은 비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작은 비석이라도 세우고 싶어 했던 정종 철학박사의 주도로 지인들이 뜻을 모아 20005월에 세운 비이다.

아버지 양경오씨가 여든의 나이에 봤다고 하여 야든이라고 불렀다는 그의 본명은 양야등이며, 189029일 영광읍 교촌리에서 났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소청 조희관 선생은 그의 짤막한 수필에서 바보처럼 진실하기만 했던 그의 일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고, 얼굴에 있는 큰 사마귀하나가 특색일 뿐 아니라, 바지 앞춤을 접어 감춘 두툼한 돈보따리의 무게 때문에 노출된 배꼽부분이 이채로왔다. 흙을 옮기는 공사판에서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곤 없는 야든이는 바지게 위에 흙이 넘쳐흐르도록 떠 부어달라고 성화며, 이것도 어쩌다가 하는 가장된 허세가 아니고, 일이 끝날 때까지 한결 같으니 세상에 둘도 없는바보칭호가 내려진 것이라고.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야든이의 한 생은 비극적 종지부를 찍는다. 9.28 수복보다 한참 뒤늦게 찾아온 수복으로 인해 전쟁의 참화가 더욱 심각했던 영광, 낮에는 국군의 세상이 되고 밤에는 빨치산의 천하가 되는 상황이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이 밝아오면 물무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고 밤이 되면 그곳에 인공기를 꽂는 위험천만한 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가장 어려운 과제를 한 몸에 떠안은 야든이, 바보처럼 너무도 순진무구했기에 그야말로 그 작업의 최적격자였는지도 모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 그를 키워 준 고향 영광을 위해 해야 할 일,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그 위험천만한 일을 누군가를 대신해서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빨치산의 총탄에 맞아 물무산 기슭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얘기만이 전해 온다.

그가 진정 바보였는지, 아니면 바보처럼 살았었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겐 이념도 없었으며 생존에 대한 위협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평화스럽던 이 땅에 찾아 온 끔찍한 전쟁의 고통을 순수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야속한 세월은 숱한 고통과 수많은 사람들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반드시 잊어선 안될 것들이 있다. 하나는 야든이와 같이 이념갈등으로 쓰러져간 무고한 대중의 안타까운 죽음과 살아남은 자들의 비통함이며 또 하나는 이 땅에 전쟁이 절대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다 고향산 골짜기에 무명용사의 주검처럼 소리없이 쓰러져간 야든이의 넋이 이 비에 평안히 깃들어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