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찬/ 자유기고가

지금 소치에선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올림픽은 지구상의 수많은 스포츠인들이 지난 4년동안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을 후회 없이 펼쳐보일 기회이자 축제의 장이다. 며칠 전엔 이상화 선수가 빙속 500m 에서 우승하며 국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개인적으로는 올림픽 신기록이자 올림픽 같은 종목 2연패라는 위업이었다. 이상화 선수 외에도 우리의 대표선수들이 소치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그 이튿날엔 남자부 빙속 경기가 열렸다. 우리들이 전날의 금메달에 환호하며 또 다른 메달을 기대할 때, 자신의 기나긴 올림픽 도전의 피날레를 준비해 온 한명의 위대한 스케이터가 있었다. 이규혁 선수이다. 메달 기대주가 아닌 여러 선수 중 하나로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그가 주종목 빙속 1,000m에서 낸 마지막 기록은 11004! 그는 이 기록으로 결국 메달권 밖으로 밀려나면서 자신의 6번째 올림픽 도전을 마무리했다.

그가 올림픽 무대에 처음 오른 것은 1994. 당시 16세로 '빙상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규혁 선수는 릴레함메르대회 500m, 1000m에 출전해 각각 36, 32위를 기록했다. 비로소 세계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697시즌부터였다. 1997년 월드컵 대회 1000m에서 11042를 기록, 한국 빙속 선수 최초로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이어 2001년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남자대회 1500m에서 14520으로 또 한 번 세계기록을 만들어냈다.

이후 이규혁은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4차례,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1차례,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에서 통산 14차례 정상을 밟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독 올림픽 메달만은 야속하게도 매번 그를 비켜갔다. 그가 올림픽에서 기록한 최고 성적은 2006년 토리노 1000m에서 거둔 4. 당시 이규혁은 동메달을 딴 에르반 벤네마르스(네덜란드)0.05초 차로 뒤지면서 통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4년후 2010 밴쿠버올림픽 1000m 레이스를 마친 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게 힘들었다"고 말하면서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규혁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도전했고 이번 소치에서는 한국선수단의 기수도 맡았다. 2011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에서 우승하고,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준우승하며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훈련에 매달렸다고 한다.

결국 올림픽에서는 '무관의 제왕'이 됐지만 그가 보여 주었던 끈기와 인내로 점철된 도전의 역사는 국내외 많은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허면서 보여준 그의 도전과 노력이 있었기에 이상화의 올림픽 금메달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의 의의가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성공보다 노력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결국 근대 올림픽 정신은 메달의 색깔이나 순위 속에 있지 않고 도전을 위한 노력, 인내와 배려, 지구촌 사람들과의 우애와 배려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규혁 선수는 그러한 올림픽정신을 몸소 보여주었고 이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그의 은퇴는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다.

피겨의 김연화, 빙속의 이상화, 모태범, 쇼트트랙 남녀선수들에게 국민과 언론매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을 때 이름조차 생소하게 들리는 타 종목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하고 있는 무명에 가까운 우리의 선수들을 헤아리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최고의 성적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그들이 자신과의 싸움, 다른 선수들과의 경쟁을 통해 보여 주는 진정한 올림픽 정신이었으면 한다.

모두가 최고일 수 없는 우리네 세상살이도 올림픽과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비록 최고는 되지 못했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생들이 수없이 많다. 최고에게 보내려 했던 찬사는 이제 좀 아끼자. 이규혁 선수와 같은 삶, 또한 화려한 조명 뒤에서 부끄럽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개미인생들이 마땅히 받아가야 할 찬사와 박수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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