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성(3)-아우구스티누스, 루소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이제부터는 여자관계가 복잡하거나 매우 불량한 경우이다. 중세 교부철학의 아버지, 성인으로 추앙받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젊은 시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자들과 연애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어서 밤이나 낮이나 그 속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나의 육체적 욕망과 청춘의 끓는 피는 나로 하여금 순수한 사랑과 흐린 정욕을 구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내 육욕은 나의 젊음과 나약한 기질을 연료로 삼아 맹렬히 불탔습니다. 그리하여 음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열아홉 살 때에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예출신의 천한 여자와 동거하였고, 그 후 곧 아들까지 낳았다. 고향을 떠난 지 4년 만에 그는 아내와 세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독교를 버리고 마니교(페르시아 사람 마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조로아스터교에 불교와 기독교 등의 교의를 뒤섞어 만든 것임) 신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자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를 쫓아내고 말았다. 얼마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 모니카(기독교의 성녀이자 현모)의 권유로 열두 살의 양가집 딸과 약혼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14년 동안 동거하여 아들까지 있는 여자를 버려야만 했다. 이때의 심정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 여자를 보낼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였다. 약혼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2년 후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루소(프랑스 계몽기의 사상가) 역시 우리의 상식을 깨트리는데 부족함이 없다. 루소는 그의 <참회록>에서 모든 것에 대해 숨김없이 고백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 일생 중 가장 결정적인 체험은 소년시절 여자 가정교사에게 매 맞은 일이다. 그때 맞은 매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최고의 쾌락이 된다. 그는 또한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자위행위의 버릇과 음부노출증(요즘 말로 하면, 바바리 맨과 한 종류)에 대해서도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약간은 자랑스럽게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몽둥이찜질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음에도.

루소가 열여섯 살쯤 되던 해에 만난 드 바렝 부인은 그의 어머니 겸 애인이 되었다. 13년이나 연상인 그녀는 루소를 어린 것이라 불렀고, 루소는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루소에게 비애를 안겨 주었다. 그녀에게는 한 사람의 애인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기가 있었던 것이다.

루소는 10여 년에 걸친 그녀와의 동거생활을 청산하고, 베네치아의 매춘부와 난잡스런 관계를 맺는다. 이때 그는 성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하였다. 그 후 파리의 하숙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한 순박한 처녀를 만나는데, 그는 그녀에게 애써 글을 가르쳐 주었으며 23년 동안의 동거 끝에 마침내 결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차례로 태어났는데, 루소는 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 버린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너무 소란스러운 데다, 양육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귀부인들을 쫓아다니는 그의 기질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부부라는 단단한 결속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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