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3)-자연사(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율곡 이이(1536-1584,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는 외갓집 오죽헌에서 사헌부 감찰사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던 율곡은 병조판서로 재직 시 10만양병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8품 정도의 벼슬에 머물러있던 이순신을 유성룡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에 대립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했다.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조선조 때의 여류문인이자 서화가. 학문과 덕이 높고 자수와 그림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함)이 세상을 떠났을 때 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신이 병석에 누워있을 때, 송강 정철이 문병을 왔다. 왜구에 대비하여 건의한 10만양병설과 이순신 중용의 건의가 당파싸움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 뒤끝이었다. 율곡은 송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송강! 사람을 쓰는데 파당을 가리지 말게.” 이에 송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인 선조 17(1584) 116일의 새벽. 율곡은 손톱을 깎고 몸을 씻은 다음, 조용히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의관(衣冠-옷과 갓)을 바로 잡은 뒤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으며, 집안에 남은 유산이라고는 부싯돌 한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임금은 그의 부음(訃音-부고)을 듣고 애통해 하였는데 그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그의 출상 날에는 골목마다 사람들이 가득차서 곡성이 진동하였으며, 밤에 시민들이 든 횃불의 불빛이 서울 교외 수십 리 밖에까지 비쳤다고 한다. 인조는 그의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고, 숙종은 그를 문묘(文廟-공자 및 대유학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하였을 뿐만 아니라 30여개 서원에 제향(祭享-나라에서 제사를 지냄)토록 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은 정조에게중용을 강의하면서부터 임금과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다산은 서양으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천주교도 믿었다. 그 후 교리의 허망함을 느끼고 신앙을 버렸지만, 반대파들로부터 서학(西學-천도교를 동학이라 불렀던 것에 대칭하여 천주교를 부르는 말)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정조는 할 수 없이 그를 유배 보낸다. 이리하여 다산은 유배지 전남 강진에서 현실정치와 거리를 유지한 채, 경세학과 목민학을 정리하는데 골몰한다. 이때 다산은 후기 조선의 봉건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회개혁안을 내놓았다. 또한 농업 기술과 기중기, 활차(도르래), 축성(성 쌓는 기술), 총포 심지어는 종두법(천연두 예방접종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다.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비롯하여 숱한 고난과 역경을 당해야 했던 다산 정약용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편에 속했다.(74) 이와 관련하여, 그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 술이 한 가지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 다산은 술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까닭은 술이 화기(和氣-따뜻한 기운)와 원기(元氣-몸과 마음의 정력)를 어느 정도 돕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술을 일종의 보약으로 간주한 그는 아들에게도 술을 마시되, 곤드레가 되도록 취하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가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장수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일흔 네 살 때였다. 고종은 다산의 저서 모음집인여유당전서를 모두 베껴 내각에 보관토록 하였고, 다산에게 정헌대부(2), 규장각제학(2)의 벼슬을 추증하는 한편 문탁(文度)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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