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호/ 백두산문인협회장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살기가 힘들고 팍팍하고 여유가 없어서인지 사람들의 말들도 강해지고 사나워졌다. 특히 요사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교수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진보와 보수, 내 편이 아니면 네 편이라는 진영(陣營)으로 나누어져 집단적인 갈등과 대결의식이 거침없이 표출되었다. 이성을 잃고 모두 미쳐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말들은 너무나 살벌했다. 단군 이래 최고 위선자, 가족 사기단 수괴(首魁), 뻔뻔함의 극치. 철면피 끝판왕, 거짓과 궤변(詭辯)의 달인,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내로남불 등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과 보편적인 정의가 통하는 사회에서는 좀처럼 듣기 여려운 말들이다.

우리네 서민들의 삶은 원하는 것 보다도 더 잘 풀려서 기분 좋고 행복했던 일 보다는 좌절하고 상처 받고 아픈 일들이 더 많은 고단한 삶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몸과 입과 마음을 사용하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一切唯心造)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생각, , 마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똑 같은 일과 사물, 사람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두운 어젯밤 목마를 때에는 달디단 감로수(甘露水)였는데, 밝은 아침에는 구역질이 나는 해골 바가지에 고인 더러운 촉루수(髑髏水)여서 크게 깨달았다는 원효(元曉)대사의 일화도 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自在)이 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잘 이겨내는 지혜로운 길이요, 중요한 수행 덕목이라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가르치고 있다.

또한 행동의 중요성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말을 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동이 운명을 개척하고 운명을 좌우한다. 실천하는 지성, 행동하는 양심, 지성과 야성(野性)의 조화는 모든 지식인들의 갈 길이다. 백 가지 생각과 천 마디 말을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돌파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역사적 실존으로서 운명을 박차고 뚫고 나가는 세찬 주체적 결단과 실천을 중시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지금도 주목을 받고 있다.

나는 마음과 행동의 중요함을 생각하면서, (言語)의 중요함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힘이나 주먹이 아니고 말로 산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에서부터 말의 소중함을 나타내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세상에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흘러간 세월, 쏘아버린 화살, 뱉어버린 말이다. 말 한 마디 잘 하고 못 하느냐에 따라서 인간관계가 결정되고, 일의 성패가 갈리고, 운명이 좌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말에는 뜻이 있고 힘이 있고 빛이 있고 향기가 있다. 부드러운 말, 진실된 말, 사랑의 말, 지혜로운 말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린다. 거짓된 말, 어리석은 말, 비난의 말, 이기적인 말은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입은 화를 불러 들이는 문이요, 혀는 자기의 몸을 찍는 칼이다(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고 했다. 남을 아프게 한 말은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되돌아와서 자기 몸을 찍는 도끼가 되기 십상이다. ‘사람의 혀 아래에 도끼가 있다(설저유부, 舌底有斧)’는 말도 한 번 뱉어버린 잘못된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고, 남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다는 뜻이다.

자나깨나 불조심 하듯이, 자나깨나 말조심 하면서 살아야 한다. 똑 같은 일과 대상을 두고 정반대의 의견을 내고, 서로 거친 비판과 비난, 막말과 증오를 주고 받는 정치권은 차치하고, 우리 일반 서민들도 항상 세 치 혀()를 조심해야 한다. 공자는 세상을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살으라(여리박빙, 如履薄氷)’고 가르쳤다.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lente)’는 유명한 철학적인 명언을 남겼다.

노자는 말을 많이 하면 궁지에 몰리기 쉽다. 때에 맞는 중용을 지키는 것 보다 못하다(다언수궁 불여수중, 多言數窮 不如守中)’고 했는데, 여기에서 중()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고,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인 침묵일 수도 있고, 때에 적중하는(時中) 언어일 수도 있다. 공자도 군자는 말을 더듬거리듯이 어눌하게 하고자 하고, 일단 결심이 섰으면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君子 欲訥於言 而敏於行)’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처세훈을 남기고 있다.

말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듣기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이 반드시 좋은 말은 아니다. 침묵도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 경우에 따라서 좋은 양약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해로운 부도덕이 될 수도 있다. 불의와 불법 앞에서 그것을 말 해야 할 정치적이든, 법률적이든, 업무적이든, 도덕적이든, 인간적이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자가 침묵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요, 범죄가 되는 수도 있다. 말을 잘 하려면 많은 지식도 쌓고, 많은 경험도 해서 견문을 넓히고 사유(思惟)의 물레바퀴를 끝없이 돌리는 수밖에 없다. 무엇이나 꾸준한 노력 없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2570년 전에 탄생한 공자는 배워도 깊이 사색하지 않으면 혼미하여 밝지 못하고(학이불사즉망, 學而不思則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오류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사이불학즉태, 思而不學則殆)’고 삶을 관통하는 교훈울 전하고 있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끊임없이 성찰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증자(曾子)매일 자기 성찰을 되풀이 한다(一日三省, 논어 학이편)’는 유명한 가르침을 남기고 있다. 성찰하지 않으면 제 부족함을 모르고 남의 조언이나 비난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능과 오만에 빠져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실수하고 내리막길을 가게 된다. 마음 먹기과 말과 행동을 잘 하려면 평생 넓게 배우고 끊임없이 성찰을 해도 미완성의 과정일 수 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몸이 영혼의 집이듯이, 존재가 사는 집이 말이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다. 언어는 존재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장소,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말은 존재 자체라고 생각한다. 말을 떠나서는 존재 자체가 없다. 어떤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사유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나 많이 부족한 나는 성 안 내는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미묘한 향기이다(面上無瞋供養具 口裏無瞋微妙香)’는 옛 선각자의 말을 자기 성찰의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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