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없이 전화가 왔다.

집사님, 왜 교회에 안 나오셨어요? 담임목사님의 전화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코로나19로 사회적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한동안 가정예배로 전환하였는데 2주전부터 총회차원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면서 집합예배를 권고한다는 메시지가 근거가 되었다 한다.

초등학교때부터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해왔던 필자도 이 메시지에는 반감이 들었다.

우리가족은 가정예배를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내 빈약한 신앙관이 바탕이지만 이유는 명확하고 간단하다. 무엇이 공동체를 위하는 일인가?

부가적인 이유는 더욱 차고 넘친다.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사회의 일상이 무너지고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사람들의 우울감은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는 분노가 반쯤 걸려있는 수류탄 안전핀처럼 민감하고 위태롭게 우리마음에 내재되어 있다.

학교를 못가는 학생, 관중이 없는 운동선수, 심지어는 코로나로 숨진 어머니를 15시간 비행기를 타고와서 자가격리로 모친상도 치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봄철 특수를 버려야하는 상가는 생계가 막막하다 그들에게 또 다른 봄은 1년 뒤에나 가능하다.

해서 우리는 정부의 지도아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룰을 정하고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만큼 잘 지키려고 각자가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이러한데 교회출석이라니? 집합예배라니? 그것도 총회차원에서 권고라니? 나의 신앙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물론 온라인 예배가 어려운 고령자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 분들은 특히 고위험군이기에 비접촉 예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전화신방이라도 더 자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자중해야 한다. 우리는 종파와 교단이 어떻든 일부교회에서 집단 확진자를 배출한 조직이다. 교회가 자발적으로 더 강화된 거리두기 운동을 해야 할 상황이지 모이자고 문자 넣을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거리두기는 누구에게나 가혹하다. 그 가혹함이 한 조직에게만 있어야 된다면 우리 교계가 손들고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자세가 아닐까?

묵묵히 견뎌내며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도하는자리에 솔선수범의 자세로 우리 신앙인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것이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512~13) 이웃을 위해 죽지는 못할지라도 내 이웃을 위험에 빠지지는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코로나19가 진정될때까지는 가정예배로 드려야겠다 다짐하였는데 목사님께서 전화왔을 때 나는 얘기하지 못했다.

기독교에서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찬사(하나님께 영광)를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마음상태가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만이 알고 있으니 행위로 마음을 표현하려한다(기도, 찬양, 헌금 등)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배 전 이웃과 다투었다면 화해가 먼저라고 했고,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2~3명이상 모인 곳이라고 배웠다. 따라서 가정예배도 교회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공동체를 소중히 생각하셨기에 공동체에 위해가 되는 일은 당연히 안하셨을 것이다.

세상의 근심걱정을 예배를 통해 위로받고 기쁨을 찾았는데 집합예배가 근심걱정이 되는 상황, 교회가는 모습을 숨기고 싶어지는 상황,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상한 역설적인 상황들...

전화로 못했던 그 말을 지면을 빌려 말씀드립니다.

목사님,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해서 당분간 가정예배로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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