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플라토닉 러브(➄소크라테스)

여고생이 국어선생님을 흠모한달지, 어떤 귀부인이 정장 차림의 멋진 신사를 사모하는 경우, 흔히들 그것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른다. 이 말 속에는 육체적인 욕망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 해석 가운데에는 다소의 오해가 있는데, 첫째, 플라톤은 육체를 경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바람직한 인간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을 신체적 건강에 두었거니와, 이는 육체적 건강을 위해 열심히 체조를 하였던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궤를 같이 하는 가치관이라고 하겠다. 또 플라톤은 유년교육의 필수과목으로 체육과 음악을 들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이 육체나 감정을 소홀히 했다고 여기는 것은 후세인들의 터무니없는 오해일 뿐이다.

둘째, 플라톤은 여자에 대해 특별히 존경을 나타낸 적이 없다. “여자란 남자보다 덕에 있어서는 훨씬 뒤쳐지고, 남자보다 약한 족속이며, 잔꾀가 많고 교활하다. 여자는 천박하고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화를 잘 내며,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데다 소심하며 미신을 잘 믿는다. 그리하여 여자로 태어난 것은 저주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자제할 줄 모르던 남자, 비겁하고 의롭지 못했던 남자들이 그에 대한 벌로 죽은 후 다시 여자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혹시 여성독자가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부분에서 플라톤 역시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미루어 짐작하거니와, 그의 저돌적인 무지(?)에 대해 실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어떻든 플라톤은 결혼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오직 유능하고 성품이 훌륭한아이를 낳아서 잘 기른다는 관점에서만 보았다. 따라서 플라톤이 생각한 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가 모두 배제된 채 정신적으로만 사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오해가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플라톤 철학 자체가 이상을 추구하는 관념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적이기 때문에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의 철학이 그와 똑같은 사랑까지 추구한 철학자로 인상 지워졌고, 바로 여기로부터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이 용어(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이 철학에 대해 취한 태도의 한 방식이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철학을 그 자체로 에로스의 한 방식으로, 따라서 본질상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 그 신화는 다음과 같다. 너무나 아름다운 프시케 공주는 어느 날 아름다운 궁전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밤마다 남편인 에로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하지만 남편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침내 언니들의 충고를 받아들인 프시케는 몰래 등불을 숨겨두었다가, 밤중에 찾아온 남편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남편은 아름다운 소년 에로스였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토닉 러브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단순히 관능적인 욕구를 억눌러 억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욕구를 더 높고 풍성한 형태로 넘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어떻든 여성 차별적 사고를 갖고 있었던 플라톤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면,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할 정도로 여권(女權)이 확장된 요즘의 기준으로 보자면, 천재적인 철학자 플라톤도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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