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언정(스피노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언정,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가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만 들으면, 그가 대단한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스피노자는 살아있을 때, 수많은 악평을 들어야 했다. 물론 그 반대편에서 찬사와 숭배의 언어가 쏟아지기도 했다. 과연 스피노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의 아버지는 세 번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는데, 스피노자는 그 가운데 둘째였다.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자 그의 생모인 한나 데보라는 그가 여섯 살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는 열네 살 때에 유대인 학교를 수료하고, 모라틸라의 율법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우리엘이라는 청년이 유대교회로부터 혹독한 파문을 당했다. 교회는 그 청년을 교회당 입구에 엎드리게 한 다음, 신자들로 하여금 그를 짓밟고 들어가도록 하였다. 이에 그 청년은 집으로 돌아가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감수성이 예민한 스피노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스무 살 때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여 스승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다른 구혼자가 값비싼 선물을 보내주자 스피노자에게서 돌아서고 말았다. 이후 그는 한평생 결혼하지 않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다. 스물네 살 되던 해에는 교회 장로들 앞에 불려가 신앙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온갖 회유에도 돌아서지 않자 사람들은 밀정을 시켜 그를 염탐하기도 하고, 뇌물로 매수하려고도 했다. 심지어 그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운다. 결국 그는 유태인 교회로부터 온갖 저주와 함께 추방령을 선고받는다.

상속권을 가로채려고 한 여동생과 법정투쟁을 벌여 재산을 되찾은 스피노자는 침대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누이동생에게 돌려주었다.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그를 피하였다. 어디를 가건 셋방도 빌려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어느 집 지붕 밑 다락방에서 살게 된 스피노자는 더욱 깊은 고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3개월 동안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떳떳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시절에 배워둔 안경렌즈 닦는 일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러다가 그의 집주인이 이사하게 되면 그도 주인을 따라 이리저리 떠돌며, 가난하고 고독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저서들은 출판되자마자 금지도서 목록에 올라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들은 표지가 바뀐 채 여러 곳으로 팔려나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모든 제안들을 거절한다. 심지어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 자리마저 사양하고 만다. 때문에 그의 생활은 실로 어려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해야 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기부금을 주어 돕겠다고 하였지만, 스피노자는 생활에 꼭 필요한 정도만 받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경렌즈 손질의 직업은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먼지투성이의 작업장이 그에게 폐병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외롭고 고요한 사색의 삶은 45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마감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스피노자의 그 유명한 말은 첫째, ‘범신론 안에서는 이 세계가 곧 신이다. 따라서 지구의 멸망은 곧 신의 멸망이 되는데, 이러한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해석이 하나 있다. 둘째는 필연적 인과법칙에 대한 믿음이다. , 세계의 종말이 필연적 사실이라면, 그러한 운명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리하여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즐겨라!”라는 말에 충실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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