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가는 시신의 처리-등석

중국의 여러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명가는 흔히 서양에서 말하는 궤변론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명가(名家)라는 말 자체가 본래 이름과 실제가 일치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허무맹랑한 궤변으로 흐르고 말았다. 과거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상가들을 길의 사거리에 서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라고 한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명가들은 마치 거리의 마술사처럼 부채를 들거나 담요를 두른 채 술잔을 빙빙 돌리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며 다니는 이상한 사람쯤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

공자의 청년 시대에 활동한 정치가 중에 등석(鄧析-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학자)이란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대부(大夫-조선시대로 치면 정1품에서 종4품 사이의 벼슬)를 지낸 바 있는 그는 말 주변이 매우 좋아 양시적(兩是的-양쪽 다 옳다고 함)인 이야기를 잘 풀어놓았다고 한다. 또한 개인 돈을 들여 학교를 연 다음, 학생들에게 범인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수(洧水)에 홍수가 나서 정나라의 부잣집 노인이 빠져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시체를 건진 사람은 거짓 공갈을 쳐서라도 부잣집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내고자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먼저 부잣집 사람들이 등석을 찾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등석은 당신네 집안에서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체를 건진 사람은 그 시체를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팔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다른 사람의 시체를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시체가 썩어갈 것이고, 그리 되면 그는 결국 당신들에게 그것을 팔지 못할까봐 도리어 전전긍긍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책을 들은 부잣집 사람들은 그 말이 옳다 싶어, 시치미를 딱 떼고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안달이 난 상대방이 집을 찾아왔고, 그가 시체의 값을 부를 때마다 거절하여 되돌려 보내곤 하였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이번에는 시체를 건진 사람 쪽에서 사정이 급해졌다. 썩어가는 시체를 집안에 놓아두자니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석을 찾아와, 역시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등석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 쪽에서도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잣집에서는 절대로 다른 곳에서 시체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시체가 또 어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때가 되면, 반드시 당신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시체가 자꾸 썩어갈수록 마음이 더 급해지는 쪽은 그 사람들일 테고, 그러면 결국 많은 돈을 물고라도 서둘러 가져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양가지사(兩可之辭)인데, 이렇게 들으면 이쪽이 옳은 것 같고 달리 들으면 저쪽이 옳은 것 같은 말로서, 이쪽도 옳지만 저쪽도 옳다고 하는 주장을 가리킨다. 명가의 사상가들은 이렇듯 변론술을 값싸게 팔아 넘겼다. 그들의 겉핥기식 궤변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데에 아무런 표준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자연히 백성들의 풍속은 흐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궤변이 영원히 통할 수는 없는 법. 전하는 말에 의하면, 결국 등석은 자산(子産, 정나라의 유명한 재상)의 손에 죽었다고도 하고, 또는 사전(駟顓)이란 사람이 정권을 잡아 비로소 그를 죽였다고도 한다. 자산이나 혹은 사전 어느 쪽이건, 결국 등석은 스스로 일삼은 궤변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며, 아마 죄의 제목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 사이비 단체를 만들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어지럽혔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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