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시간상의 차별은 없다-혜시

(惠施, 기원전 360-260)는 장자(莊子)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송나라 출신이다. 양 나라의 혜왕과 양왕 밑에서 재상을 지냈다고 하며, 박학다식하여 그 저작이 다섯 수레에 찰 정도였다고 한다. 장자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으나, 서로의 사상이 달라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혜시가 죽은 후, 장자는 그 무덤 앞을 지나면서 나는 변론의 상대를 잃어버렸도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혜시는 첫째, 공간상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였다. 공간에 대해 우리가 겉으로만 본다면 크고 작음과 높고 낮음, 멀고 가까움과 안과 밖, 엷고 두터움 등의 차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표면을 뚫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두 다 똑같다. 예컨대, 아주 큰 것은 밖이 없고 아주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비록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무궁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또 하늘과 땅, 산과 연못은 맨땅 위에서 바라보면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높은 공중 위에서 바라보면 똑같은 평면일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엷은 것일지라도 하나의 면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기에, 그것을 무한히 작은 것으로 쪼갤 수가 있다. 그런 다음 그 길이를 이어놓는다면, 천리(千里)와 같을 것이다. 두껍다거나 엷다거나 하는 공간적인 차별은 없다는 뜻이다.

둘째, 혜시는 시간적인 차별도 없애고자 하였다. 가령, 오늘 내가 월(-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로 떠났을지라도, 거기에 도착한 후 내가 떠나던 그 날(오늘)은 이미 옛날 일이 되고 만다. 오늘(1)의 시점에서 보면 내일(2)은 장차 다가올 미래의 일이지만, 시간이 흘러 모레(3)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내일(2)은 이미 지나간 과거(2-어제)일 뿐이다. 우리가 삶과 죽음을 차별하는 까닭은 시간상으로 과거와 미래를 구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앞뒤의 구별이 없는 하나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삶과 죽음 역시 시간의 흐름 위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혜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관념상의 차별을 쳐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관념상으로 같음과 다름(同異)을 구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은 같음 속에 다름이 있고, 다름 속에 같음이 있다. 예컨대, 너와 나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같은 나뭇잎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잎사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 우리 눈앞에 있는 둥근 고리가 현실적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관념상으로는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앞의 현상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물에는 차별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의 관념상으로는 그것들을 얼마든지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착안하여 우리가 모든 사물을 넓은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천지가 곧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다.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르지만, 전체 인류라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가 한 나라요, 같은 민족이다. 이러한 사상을 확대해나간다면 사해 동포주의(四海 同胞主義-모든 인류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주의)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혜시에 의하면, 모든 사물에 대한 차별은 우리의 주관적인 관념상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모두가 똑같다. 우리가 나만을 생각하고 산다면, 영원히 다른 사람을 이해하거나 동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모두를 사랑하고 또 모두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세상이 한층 더 평화로워지고 화목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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