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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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김처선

조선조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는 김처선은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환관이었다.

내시의 최고위직인 판내시부사와 상선에 올랐던 그는 세종조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왕을 모셨을 만큼 조선왕조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시로써의 그의 삶은 평탄하지가 못했다.

종 때 내시로 입궐한 그는 문종 때 경상도 영해로 유배(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되었다가 단종1년에 풀려났지만 이듬해 금성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이 된 후 관노로 전락한다.

세조 3년에 다시 복직이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이 되었으며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장관격인 정2품 자헌대부에까지 오르는 등 그의 여정은 굴곡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내시로 지내오는 동안 궁중의 법도와 왕도(王道)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그는 왕의 행실에 대해 때때로 직언을 했지만 늙은 노신의 충심을 잘 알고 있었던 왕들은 그의 충언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505년 어느날, 연산군이 궁중에서 기녀 흥청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창안했다는 처용희(處容戱)라는 음란가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신하들은 왕의 음행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지켜만 볼뿐 누구 한 사람 나서 감히 간언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김처선이 목숨을 걸고 극간(極諫)을 했다.

이 늙은 신()4대 임금을 섬겨 대략 서사(書史)에는 능하온데 고금의 군왕으로 이토록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감히 내시 따위가 임금에게 헛소리를 지껄인다며 그의 가슴에 활을 쏘고 두 다리를 잘라버렸다.

그래도 성군이 되라며 직언을 멈추지 않자 그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죽였다고 실록은 전한다.

김처선의 연좌형벌은 이에 그치지 않았는데 아내와 며느리가 노비로 팔려가고 양아들은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부모의 묘소마저 파헤쳐지고 말았다.

역신 임사홍

성종 때 도승지를 지낸 임사홍은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를 옹립한 쿠데타 공신들을 싸잡아 비난하다 일명 흙비(황사)사건을 핑계로 탄핵되어 의주로 귀양을 갔다.

삼십여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하며 겪었던 고초가 뼈에 사무쳤던지 그는 연산군 즉위 후 성종의 부마였던 넷째아들의 주선으로 정계에 복귀를 하면서부터 심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연산군 재위 10년째 되던 해 연산군의 친모 폐비윤씨사건을 공론화하면서 왕을 부추겨 중전 윤씨의 폐퇴출에 관여한 대신들을 극형에 처하도록 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자식까지도 내버리는 비정한 애비였다.

연산이 그의 충성심을 시험하고자 큰 아들 희재가 쓴 병풍의 문구를 문제 삼아 짐이 경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라고 묻자 무릎을 꿇고 제 아들이 원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하다고 아뢰어 왕의 의도를 추종함으로써 결국 그의 아들은 살이 한 점씩 뜯겨나가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충성심(?)을 확인받은 그는 이때부터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대신들 간에 이간질을 하거나 중상모략을 하여 조정에서 쫒아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채홍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임금에게 바칠 처녀들을 징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군과 폭군 사이

연산군이 애초부터 폭군이 아니었다.

즉위초기에는 왜구와 건주야인(여진족)을 격퇴하고 비변사를 설치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빈민을 구휼하고 국조보감을 완성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군왕이었다.

그러나 간신 임사홍과 유자광을 만나면서부터 그는 미치광이 군주로 변해갔으며 사화라는 피바람을 일으키고 음탕한 짓을 이어가다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 유배지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던 어찌 보면 간신들의 권력욕에 이심전심 이용을 하고 이용을 당했던 불운한 왕이었다.

사화를 일으켜 대신들을 처형하고 왕의 음행과 폭행을 부추겼던 임사홍은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동인 된 반정세력에 의해 몽둥이에 맞아 죽었으나 다시 시신마저 꺼내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간신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그러나 김처선은 죽은 지 250여년이 되던 해인 1751(영조 27) 그의 고향에 충성심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진다.

우리는 연산이라는 왕을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은 왕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직언을 했던 충신이었던 반면 다른 한사람은 무구한 왕의 눈을 가리고 악행을 부추기며 권력을 탐하다 결국에는 왕을 싸안고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간신이었다는 것을....!

연산군이,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직언을 하는 김처선을 향해 활을 쏘고 다리를 잘라버린 후 일어나라며 불같이 화를 내자 그는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음을 걸으시옵니까?”라고 대답을 했다.

수족을 잘라버리고 걸으라고 명하니 어찌 임금의 명에 따를 수 있겠느냐는 고언이었다.

그의 이 절절한 한마디가 요즘의 권력자들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역사는 반복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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