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공동체 살림꾼

코로나19 재확산의 도화선이 된 사랑제일교회를 비롯한 개신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겁다. 이는 국가적 방역활동을 방해한 행위에 대한 비난을 넘어, 바람직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교회를 통해 표출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독교를 전공한 신학자인 박경미의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라는 책을 다시 펼쳤다. 책은 2천년 전 예수의 삶과 시선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낙원 밖에 살지만 끊임없이 낙원에 대한 기억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하는 인간의 딜레마와 고통을 성찰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누구나 이 물음 앞에 서 있다. 박경미는 그러므로 이 물음 앞에 얼마나 자주 서는가, 이 물음에 얼마나 진지하게 답하는가 하는 정도로만 나는 진실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커녕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어야 할 종교가 화려한 성전을 짓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모습은 씁쓸하다. 예전에 남산 위에서 바라본 서울의 밤하늘은 빨간 십자가가 빼곡히 늘어선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었다. 저 많은 십자가들 중에 진정으로 하늘에 닿아있는 생명의 사다리는 몇 개 쯤이나 될까. “하나님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경의 한 구절이다. 경쟁이 도덕의 자리를 대신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진리를 위협하는 사회는 장사꾼의 소굴이나 다름없다. 장사꾼의 소굴로 변한 세상은 인간의 세계도 우정의 나라도 아니다. 마몬의 세계, 야수의 세계다. 마몬의 세계 속에 마몬의 교회가 있다.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종교가 탄생하고 사라졌다. 기독교만 예외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박경미는 영양 부족도 치명적이지만 영양 과다는 치명적인데다가 추하기까지 하다. 지금 기독교는 혈관 속속들이 끈적끈적한 기름이 끼어 비대한 살집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잠시 더 버티겠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죽어가고 있으며,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가 산다.’고 일갈한다.

로마제국의 침탈과 헤롯 가문의 수탈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2천년 전 갈릴리 마을. 상부상조와 연대의 원리를 삶의 근간으로 삼아왔던 갈릴리 농경사회는 지배자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예수는 핍박받던 갈릴리 농민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삶을 나누었다. 이스라엘 민중의 지도자 예수가 현실에 되살리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공동체였다. 갈릴리 마을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는 가난을 한탄하는 대신 서로의 빚을 탕감해주고(누가 11:2~4, 마태 18:23~34) 상대방의 근심과 기본적인 필요를 들어주라(누가 6:27~36)고 요구한다. 이는 예수가 설계한 지역공동체 갱신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확신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본적 생활 형태를 이루었던 마을공동체들에서 평등주의적이며 서로간에 지원하는 사회경제적 관계를 재확립하는 갱신 프로그램을 밀고 나갔다. 물자가 충분하지 못하고 빈곤한 고대 농경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포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좀 더 가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어야 나눌 수 있고, 나눌 수 있을 때 더불어함께 살 수 있다. 공동체적 삶의 조건이란 가난함과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다. 성경은 가난한 자박해받는 자에게 이 있다고 강조한다.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고 영혼의 구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진실한 사랑에 바짝 다가가고자 한다면 가난하고 베풀라고 말한다. 예수의 가난한 마을공동체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물어야 한다. 거대한 악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고르게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잘 나눌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는 먹고 사는 일에 인간다움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 경기도 일산에서 예배당을 없애고 보증금을 빼서 신도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한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 교회의 송명수 목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떡을 나눠 먹는 게 교회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는 옳고 참된 것은 기가 막히게 제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행해야 할 일은 외면하거나 포기해 버린다. 지금은 형식적으로 한번 나눠 주고 끝낼 게 아니다. 어려운 공동체, 이웃을 품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기독교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 때, 한 작은 교회의 묵직한 실천이 큰 울림을 준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